외로운 선장 ⓒ gettyimages/멀티비츠 |
1927년 10월6일, 월드시리즈 1차전이 열린 피츠버그 파이러츠의 홈구장 포브스필드(Forbes Field). 경기에 앞서 뉴욕 양키스의 연습 배팅이 시작됐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밥 뮤젤과 토니 라제리가 광활한 포브스필드(좌로부터 110-141-135-115미터)의 담장을 펑펑 넘기자 모두가 경악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피츠버그 외야수 로이드 웨이너는 형 폴 웨이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저 덩치들 좀 봐, 쟤들은 맨날 저런 식으로 친대?"(Gee, they're big guys, do they always hit that hard?") 피츠버그에게 1927년 월드시리즈는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은 역대 최고의 쌍포 루스와 게릭이었다.
피츠버그는 선전했다. 그 해 107개의 홈런을 때려낸 루스(60개)와 게릭(47개)를 상대로(반면 피츠버그의 팀 홈런수는 54개였다), 루스에게만 홈런 두 개를 맞았다. 덕분에 피츠버그는 110승44패(.714) 팀인 양키스를 상대로 '망신 없는 4연패'(4-5, 2-6, 1-8, 3-4)를 당할 수 있었다(그로부터 33년 후, 피츠버그는 1960년의 양키스를 상대로 짜릿한 7차전 끝내기 홈런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함께 양키스 타선을 책임진 10년 간(1925-1934), 루스는 3번, 게릭은 4번을 쳤다(때문에 루스가 등번호 3번을, 게릭이 4번을 달았다). 메이저리그가 4번이 아닌 3번에 가장 중요한 타자를 배치한 것은, 설령 3자범퇴로 끝날지라도 1회부터 팀 최고의 타자를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3번타자인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루스는 게릭을 자주 무시했다(물론 199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는 이들을 능가하는 적대 관계의 쌍포가 등장한다).
얼마전 ESPN은 역대 최고의 쌍포(hitting duo)를 뽑았다. 물론 1위는 루스와 게릭이었다(같은 기간 연평균 성적 & bwar).
1. 베이브 루스 & 루 게릭(1925-1934)
루스 : .338 .469 .677 / 42홈런 132타점 (9.5)
게릭 : .343 .444 .643 / 35홈런 144타점 (8.2)
2. 윌리 메이스 & 윌리 매코비(1959-1971)
메이스 : .298 .381 .552 / 33홈런 96타점 (8.0)
매코비 : .283 .387 .552 / 28홈런 81타점 (4.4)
3. 미키 맨틀 & 로저 매리스(1960-1966)
맨틀 : .295 .424 .582 / 31홈런 80타점 (5.1)
매리스 : .265 .356 .515 / 29홈런 78타점 (3.8)
4. 데이빗 오티스 & 매니 라미레스(2003-2008)
오티스 : .297 .398 .598 / 38홈런 122타점 (4.5)
매니 : .312 .411 .586 / 36홈런 115타점 (4.2)
5. 행크 애런 & 에디 매튜스(1954-1966)
애런 : .317 .375 .564 / 34홈런 110타점 (7.4)
매튜스 : .273 .381 .513 / 32홈런 92타점 (6.4)
6. 배리 본즈 & 제프 켄트(1997-2002)
본즈 : .310 .472 .689 / 46홈런 110타점 (8.6)
켄트 : .297 .368 .535 / 29홈런 115타점 (5.2)
7. 로베르토 클레멘테 & 윌리 스타젤(1963-1972)
클레멘테 : .331 .378 .506 / 16홈런 81타점 (7.0)
스타젤 : .279 .351 .523 / 28홈런 89타점 (3.3)
8. 켄 그리피 & 에드가 마르티네스(1990-1999)
그리피 : .302 .384 .581 / 38홈런 109타점 (6.7)
에드가 : .322 .430 .532 / 20홈런 75타점 (5.2)
뒷 타자가 강하면 (앞 타자와 정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 타자가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우산 효과'라는 말은 심심치 않게 사용된다(딕슨 야구사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용어다). 그러나 세이버메트리션 J C 브래드버리는 오히려 그 정면 승부가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살인 타선(푸홀스-에드먼즈-롤렌)이 해체된 이후 세인트루이스의 고민은 '최고의 3번' 앨버트 푸홀스와 짝을 이룰 수준급 4번타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2009년 7월 세인트루이스는 마침내 소원을 풀었다. 세인트루이스는 오클랜드가 넉 달을 쓰고 시장에 내놓은 맷 할러데이를 아무런 손실도 없이 데려왔다.
하지만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2008년 .462로 정점을 찍었던 푸홀스의 출루율이 2009년 .443를 거쳐 할러데이가 풀타임으로 4번을 친 2010년에는 .414까지 떨어진 것이었다(세인트루이스 4번 타순 OPS - 2007년 리그 16위, 2008년 9위, 2009년 7위, 2010년 3위). 물론 이는 푸홀스의 노쇠화와 관련되어 있거나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푸홀스는 할러데이가 등장하고 나서는 공짜로 얻다시피하던 출루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 '강한 앞 타자에 이어 등장하는 뒷 타자'는 어떨까. 앞 타자가 뛰어나면 뒷 타자는 주자를 두고 나서는 타석의 숫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되려 타자에게 중압감을, 투수에게는 더 높은 집중력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금지약물 듀오 ⓒ gettyimages/멀티비츠 |
흥미로운 점은 앞서 살펴 본 쌍포들 중 메이스(우)와 매코비(좌), 맨틀(양)과 매리스(좌), 오티스(좌)와 라미레스(우), 애런(우)과 매튜스(좌), 본즈(좌)와 켄트(우), 클레멘테(우)와 스타젤(좌), 그리피(좌)와 마르테네스(우)는 모두 반대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들의 조합이었다는 것. 루스-게릭 이후에 결성된 게릭(좌)과 디마지오(우)를 비롯해 칼 립켄 주니어(우)와 에디 머레이(양), 최근에 등장했던 프린스 필더(좌)와 라이언 브론(우), 필더(좌)와 미겔 카브레라(우)까지. 루스(좌)와 게릭(좌), 그리고 '배시 브라더스'로 불린 마크 맥과이어(우)와 호세 칸세코(우)를 제외한 역사적인 쌍포들은 대부분 좌타자와 우타자, 또는 스위치히터가 섞인 조합이었다.
2014년 4월, 샌프란시스코의 유니폼을 입게 된 마이클 모스(현 피츠버그)는 mlb.com과 흥미로운 인터뷰를 했다. 자신은 센터 방향을 노리는 타석에서의 접근법이 4번타자 버스터 포지와 비슷한데, 포지 다음에 5번타자로 나서게 되면 포지의 타격을 자세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 투수들이 포지와 같은 방식의 승부를 걸어오는 경우가 많아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있고 얼마 후, 브루스 보치 감독은 포지를 3번으로 옮기고 스위치히터 파블로 산도발을 4번에 넣는 것으로 포지와 모스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모스가 했던 인터뷰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투수 입장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가 연속해서 나오면 앞 타자와의 승부를 통해 얻은 정보를 뒷 타자에게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슬라이더가 제대로 먹힌다는 것을 확인했을 경우 자신있게 슬라이더 결정구를 던질 수 있으며, 반대로 슬라이더의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앞의 타자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1990년 피츠버그는 클레멘테-스타젤 이후 최고의 중심타선을 만들어냈다. 앤디 반슬라이크(좌)-바비 보니야(양)-배리 본즈(좌)라는 최강의 공격 트리오가 등장한 것. 하지만 좌타석에 들어서는 일이 너무 많았던 이들은 포스트시즌에서의 표적 등판에 애를 먹었다(결국 피츠버그는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년 연속으로 패하고 만다).
앤드류 매커친(28)이라는 최고의 타자가 3번에 고정된 2012년 이후, 피츠버그의 다음 과제는 매커친에게 좋은 파트너를 찾아주는 것이었다(피츠버그 3번 타순 OPS 순위 - 2012년 리그 3위, 2013년 3위, 2014년 1위, 2015년 2위). 그러나 그 고민은 4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4번 타순 OPS 순위 - 2012년 리그 15위, 2013년 9위, 2014년 14위, 2015년 15위). 특히 아쉬운 것은 좌타자로서 우타자 매커친과 좋은 짝이 될 수 있는 페드로 알바레스(28)의 부진이다(4번 통산 .192 .276 .363, 5번 .268 .333 .469).
피츠버그가 2008년 전체 2순위로 뽑은 선수인 알바레스는(3순위 캔자스시티 에릭 호스머, 5순위 샌프란시스코 버스터 포지 지명) 에이전트가 스캇 보라스인데다가 내년 시즌이 끝나면 FA가 된다. 게다가 올시즌을 통해 1루수로서의 수비 역시 믿고 맡길 수 없음을 확인했다. 만약 피츠버그가 알바레스를 포기하기로 한다면, 매커친의 새로운 파트너가 될 4번타자는 1루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지난해가 유일한 20홈런 시즌이며 역시 내년 시즌 후 FA가 되는 닐 워커 역시 4번에 어울리는 타자는 아니다).
우타자 중심의 타선(매커친 마르테 해리슨 강정호 서벨리)을 가지고 있는 피츠버그 입장에서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1루수는 좌타자다. PNC파크에서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것도 좌타자다. 마침 피츠버그는 조시 벨(23)이라는 거물급의 스위치히터 1루수 유망주를 보유하고 있다.
피츠버그가 2011년 2라운드에서 뽑은 우투양타의 외야수인 벨을 올해 1루수로 전환시킨 것은 이미 그 프로젝트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벨은 기대했던 파워 포텐셜을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더블A .307 .376 .427), 트리플A 수업을 시작한 그가 내년 메이저리그에 등장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피츠버그는 벨에게 시간을 벌어줄 플래툰 1루수로 우타자를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싱겁게도 모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다).
과연 내년 시즌 매커친 다음에 등장하는 타자는 누가 될까. 지금까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도 주인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