国際政治·국제관계론

동북아외교 균형 못잡고 강대국 파고에 난파된 박근혜 외교

雄河 2015. 12. 27. 10:32

[와카미야의 東京小考]박근혜 외교, 뱃머리를 돌릴 때

기사입력 2014-06-05 03:00:00     기사수정 2014-06-05 11: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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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진출 야망 노골화… 주변국과 갈등 키우는 中
美日-中의 첨예한 대립속에 中 편드는듯한 한국행보… 향후 한국외교에 역풍될 수도
日과 냉랭한 관계 조속 회복… 동북아 외교 균형 잡아야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한여름을 연상시키는 듯한 더위에 휩싸인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지난달 말 ‘한중일 심포지엄’이 잇따라 열렸다. 하나는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과 동아일보, 아사히신문이 공동 주최한 행사. 또 하나는 중국사회과학원과 동서대, 게이오대의 공동 주최 행사. 둘 다 3개국을 돌아가며 매년 실시되고 있는데 올해는 우연히 하루 차이로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아사히신문에 있던 시절 10년 동안 앞의 행사에 참석했던 필자이지만 지난해 은퇴한 후로는 후자의 행사에 두 번 참가하게 됐다. 그 덕분에 12년 연속 ‘한중일’ 논의에 참가한 셈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보면 3국 관계의 큰 변화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많은 문제에서 한일이 중국을 끌어가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일과 한일 간에 긴장이 높아지는 한편 중국과 한국의 접근이 있을 때마다 화제가 된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 방중으로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중국에서 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 문제는 일본의 역사 인식이며, 한국과 보조가 맞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얼빈 역에 안중근 기념관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지만 거기에는 한국을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아베 총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확실히 걱정이지만 군사력을 점점 늘리고 적극적인 해양 진출의 야망을 숨기지 않는 중국은 더 큰 불안의 씨앗이다. 거기에 한국이 가담하는 모양새가 괜찮을지 걱정이다.

한국에서 보면 막대해진 경제관계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중국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또한 아베 총리의 언동이 떠밀고 있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과의 동맹도 생각하면 ‘일본보다 중국에 너무 치우치는 것은 과연 괜찮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이런 때에 화제가 되는 것이 곧 있을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방한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또 썰렁한 분위기가 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북한임에 틀림없다. 북-중은 동맹 관계이면서도 김정은 체제가 된 후 정상의 왕래가 전혀 없다. 박 대통령의 방중만으로도 북한은 불쾌했을 텐데 시 주석이 방한하면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그런데, 한중일 심포지엄을 마치고 베이징에서 도쿄로 돌아가자 곧 발표된 게 북-일 양국 합의였다. 북한이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의 재조사를 약속하고 일본은 그 실시 시기에 맞춰 대북 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한중에 외면당한 북-일이 이때라는 듯 손을 잡은 것인가. 그런 생각도 스치는 전격적인 발표였다. 납치 문제는 난제여서 앞으로의 진전에 상당한 의문도 있지만 북한이 합의를 문서로 만들고 자국 TV에서도 발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획기적인 진전이 없을 것만도 아니다.

그렇게 보면 한중 접근은 일본에 나쁜 것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중국도 한국 카드를 사용하면서 북한을 자극하고 개혁의 방향으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임까지는 아직 좋다고 할지라도 최근 중국에서는 역시 위험의 경계선을 넘어선 행동이 눈에 띈다. 남중국해에서는 필리핀과 베트남 앞바다에서 강압적인 행동에 나서 베트남 함선을 침몰시켰다. 센카쿠(尖閣) 열도를 둘러싸고 분쟁 중인 동중국해에서는 중국 전투기가 일본의 자위대 항공기에 근접 비행을 했다.

이를 둘러싸고 미일과 중국이 비난을 주고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중국을 편드는 것처럼 비친다면 향후 한국 외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요점은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조언처럼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열쇠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므로 이를 서로의 노력으로 타개하기 위해 아베 총리를 심각하게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진로가 열리지 않는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가 양보할 기회다.

한국은 요즘 세월호 침몰 사고와 지방선거로 큰 외교 전략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말하고 있을 순 없다. 지금부터 다이내믹하게 외교의 뱃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박근혜 외교가 거센 파도를 넘어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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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언론계의 수퍼스타, 스카우트 제의 뿌리치고 한국행 택한 이유  2013.08.10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

일본 아사히신문이 운영하는 한국어사이트 ‘아사히 아시아 안테나’에는 지난 3월 21일부터 ‘서울에서 쓰는 편지’라는 글이 실리고 있다. 7월 26일까지 9회가 실린 이 기사는 인기가 높다. 한 일본 언론인이 퇴직 후 한국에서 교수 및 학생 신분으로 혼자 살면서 겪은 일과 감상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 기사 필자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이것도 인기를 더해주는 요인이다.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65) 아사히신문 전 주필이 화제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본 언론계의 수퍼스타였다. 도쿄 태생으로 도쿄대 법대를 나와 1970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해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주간을 거쳐 2011년 5월부터 제6대 주필을 지내다 지난 1월 16일 퇴직했다. 아사히신문의 주필은 대단한 자리다. 이 신문은 역사가 134년이지만 주필은 6명밖에 없다. 2차대전 후에는 주필이 늘 있는 게 아니라 ‘감’이 되는 사람이 있을 만 주필을 했다. 그 앞에 주필만 해도 30년간 주필이 공석이었다가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가 2007년 6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제5대 주필을 지냈다. 와카미야씨가 퇴직한 이후 아사히신문의 주필 자리는 비어 있다.

와카미야씨는 도쿄대 법대와 아사히신문이라는 일본 최고 파워엘리트군(群)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퇴직을 앞두고 있을 일본 내에서 ‘거물’을 모셔 가려는 러브콜이 많았다. 굳이 한국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그가 이역(異域)행을 택한 것은 ‘지한파(知韓派)’로 불리는 그의 인생역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현재 부산의 동서대 석좌교수와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한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포럼’에서 그는 지인들에게 “다음달에 (아사히신문을) 그만둔다”고 말했다. 그는 1993년에 시작한 한·일포럼의 창립멤버다. 창립멤버로서 아직 남아 있는 일본인은 그 외에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가 또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국인 중 친분이 두터운 동서대 장제국 총장과 박철희 서울대 일본연구소장이 그에게 한국행을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한국과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1978년 4월 도쿄 신주쿠의 아사히컬처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열리는 ‘조선어강좌’였다. 지난 8월 6일 만난 와카미야씨는 “당시 정치부 기자로 있었지만 약간 한가한 분야 담당이라서 시간이 좀 났습니다. 영어는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한국어를 배워 두면 쓸모가 많겠다 싶었습니다. 한국어가 일본 사람이 배우기 쉽다는 말도 들었고요”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거의 관심이 없던 한국어를 그는 왜 배우려고 했을까? 그는 입사 후 일본 언론계의 관행에 따라 지방근무를 하고 있었다.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나가노(長野)지국에서 근무하면서 ‘피차별 부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00회 넘게 연재했고 책으로도 펴냈다. ‘피차별 부락’은 19세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일본 내 하층계급을 가리킨다. 주민은 부락민으로 불린다. 부락민들은 ‘자이니치(在日)’로 불리는 재일동포와 함께 일본 내 대표적 소외집단이다. 그는 재일동포는 물론 이들의 모국인 한국에도 관심이 많았다.

회사일 하면서 공부하기가 생각보다 여의치 않아 그의 한국어 공부는 한 달 만에 끝났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배운 한국어를 써먹을 기회를 생각보다 빨리 잡았다. 이듬해인 1979년 여름 처음으로 한국에 갔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 방위청 장관을 따라왔는데 판문점도 가고 제3땅굴도 가봤다. 1980년 9월에는 자민당 내 ‘아시아·아프리카 연구회’라는 모임을 따라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도 만났다. 1년 동안 남북한을 모두 방문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한국과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니 입사일부터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는 1970년 4월 1일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이날자 일본 신문들은 ‘요도호 사건’으로 도배를 했다. 요도호 사건은 1970년 3월 31일 일본 적군파(赤軍派)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공항을 출발, 후쿠오카(福岡)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사건이다.

그는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결심한다. 회사에 한국어 연수를 신청해 1981년 9월부터 1년간 한국에 와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녔다. 이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1981년 크리스마스 무렵의 일이다. 그는 무작정 지방으로 혼자 떠났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서 옆에 앉은 사람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는 한국말 배우는 일본 사람이 없어서 한국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친절하게 대해 줬습니다.”

대전의 한 다방에서는 간첩으로 몰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배가 좀 고파서 다방에 들어가 다방아가씨한테 혹시 토스트 없냐고 했더니 없다고 하더군요. 인근 성당을 구경하고 나왔더니 경찰 둘이 기다리고 있다가 저를 붙들어가더라고요. 그 아가씨가 저를 간첩인 줄 알고 신고한 거였어요. 경찰한테 제 신분증을 보여줬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풀어줬는데 저한테 ‘왜 배가 고픈데 식당에 안 가고 다방에 갔느냐?’고 묻더라고요.” 문화 차이에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일본 깃사텐(찻집)에서는 토스트 같은 걸 팔았거든요. 제가 배우던 연세대 어학당 교과서에도 이상한 사람을 보면 간첩신고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아쉽게도 서울특파원으로 가지는 못했다. “나는 정치부에서 유학한 케이스니까 불리했습니다. 당시는 국제부에서 서울특파원을 보내고 있었어요.” 정치부에서 에이스였기 문에 특파원으로 가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도 “워싱턴특파원 못한 건 아쉽지 않지만 서울특파원 못한 건 아쉽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1년에 몇 번씩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1993년 한·일포럼에 창립멤버로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일포럼은 정치인과 경제인, 학자, 언론인 등 약 50명이 참가해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가며 열리는 권위 있는 모임이다.

도쿄대 법대, 아사히신문이라는 스펙과 한국에 대한 관심이 시너지효과를 낳아 그는 많은 한국인을 사귀었다.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40~50명은 될 것”이라고 답한다. 물론 모두 VIP급이다. 그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 영결식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모두 주최 측의 초청을 받아 손님으로 참석했다.

지난 8월 6일 서울 신촌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을 도 오후 4시40분쯤 한국의 전직 총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약속을 정했다. 전직 총리와는 20년 전부터 알고 지낸다. 저녁 6시50분 무렵엔 친분이 두터운 가수 조용필씨가 그에게 ‘번개’ 저녁을 제안했다. “조용필씨와는 알고 지낸 지 30년 넘었어요.”

작곡가 고 길옥윤씨도 오래전부터 알았다. “1982년 9월에 한국 유학이 끝났을 싱가포르로 놀러갔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소리는 내지 않으면서 피리 연습을 열심히 하더군요. 인사를 했는데 길옥윤씨였어요.”

지난 8월 5일 임명된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도 잘 아는 사이다. “어제(8월 5일) 청와대 인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박준우씨 이름이 있잖아요. 박준우 정무수석과는 1994년 (그가) 일본대사관에서 정무과장으로 일 할 부터 알았고 2004년 외교통상부 아태국장 할 친해졌습니다.”

그는 3월 초부터 서울 신촌의 리빙텔에서 지낸다. 요즘은 대학가 부근에도 옛날식 하숙집은 사라졌고 1인 1실 개념의 리빙텔이 대세다. 60대인데 홀로 외국에서 생활해야 하는 그를 딱하게 여긴 직장(아사히신문) 후배가 주선해서 리빙텔 주인 내외와 아침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쓰는 편지’ 7월 26일자에서 이렇게 적어놨다. “영양에 대해 잘 아는 (주인)아주머니가 마련하는 식사는 채소와 풀이 풍성해 맛도 있고 건강에도 참 좋다. 로 냉면이나 삼계탕, 수제비 같은 것도 해 주는데 웬만한 식당은 저리 가라 할 솜씨다. 아침은 샌드위치에 집에서 만든 요구르트나 토마토주스. 나는 운이 좋았던 셈인데, 한편 한국도 변했구나 실감한다.”

일과는 바쁘다. 교수, 객원연구원의 신분도 있지만 학생 신분도 있기 문이다.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을 받아 3월 초부터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을 다니고 있다.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은 총 7급까지 있는데 급수가 높을수록 어렵다. 그는 처음에 5급반 판정을 받았다가 지금은 6급반으로 옮겨 공부하고 있다. 오는 8월 20일 졸업식을 앞두고 그는 반 친구 11명과 함께 졸업작품으로 한국을 소재로 한 코믹비디오를 만드느라 바쁘다.

그는 자식뻘인 학우들과 오랜만에 하는 학교생활이 재밌다고 했다. “한 반에 12명인데 5급 는 일본인이 저 포함해서 2명밖에 안 됐는데 6급반은 6명이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이집트,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루마니아, 몽골, 러시아 등 다양합니다. 연령대도 20~30대가 많아서 화제도 재밌습니다. 2PM, 2AM, 샤이니 이름이 나오고 여학생들은 남자친구가 어쩌고저쩌고 해요. 저는 반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당일치기 MT도 계획 중입니다.” 주말에는 한국에서 사귄 젊은 친구들과 홍대앞에 가서 록 공연도 보면서 활기 차게 보낸다.

오는 9월에 일본에서 선보이는 책 ‘신문기자’의 출간 준비로도 바쁘다. 유명 출판사인 ‘지쿠마(筑摩)서방’에서 펴내는 이 책은 40년에 걸친 그의 정치 담당 기자로서의 내공이 온축돼 있을 것으로 보여 현지의 기대가 크다.

오랫동안 한국어를 접해온 만큼 한국어 실력도 뛰어나다. 기자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김해’라고 했더니 “잘 압니다” 하면서 “억수로”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덧붙였다. 기자는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한국 사람들처럼 ‘북해도’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터뷰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하면서 간혹 일본어를 섞어서 했다.

그는 한국 음식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묻자 돌솥비빔밥, 삼계탕, 간장게장 등을 들었다. “특히 간장게장은 지난달(7월)에 일본에 있는 가족들이 한국을 다녀갔을 너무 맛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는 동갑내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만 셋을 두고 있다. 막내아들만 아직 미혼이고 두 아들은 결혼해 각각 딸 하나를 둬서 손녀만 둘이다. 왜 부인과 함께 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하고 같이 오면 한국말 모르는 아내를 돌보느라 제가 한국말 공부를 못하지 않나요?” 온화하고 잘 웃는 인상과는 달리 독한 결의가 느껴졌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일본의 대표적 언론인을 만났으니 한·일 관계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 없다. 그는 작금의 한·일관계가 나쁘다는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한쪽 면만 보지 말고 폭넓게 볼 것을 주문했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고 일부러 한국을 위해서 데모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혐한파에 대항해서 보통 일본인들이 시위를 하잖아요. 요즘은 한국이 강한 나라가 됐고 한류 붐도 있고 한국 드라마도 하니까 일부러 일본에서 우익이 시위를 하는 거죠. 창피한 일이에요.”

그는 “정치관계는 나쁘지만 국민관계는 옛날보다 훨씬 좋아지고 성숙해졌다”고 말했다. “우리 반에 오사카 출신의 일본인 여학생이 있어요. 이 학생은 어릴 부터 할머니가 한국을 싫어해서 한국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고등학생 수학여행을 부산으로 와서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대학도 일부러 한국어과를 갔습니다. 이 학생의 엄마도 한류 덕에 한국말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국의 정치인과 언론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가의 위기관리는 원래 정치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두 나라는 국민과 국민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안심하면 안 됩니다. 정치가 나빠지면 국민 사이도 영향을 받기 문입니다. 두 나라의 정치인과 언론은 국민한테 배워야 합니다.”

그는 2005년에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설을 썼고, 1995년에는 월드컵을 한·일 공동 개최하자는 사설을 써서 큰 반향을 낳았을 정도로 지한파 내지는 친한파다. 그런 만큼 그의 말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언론도 민족주의 과잉 보도를 자제해서 친한파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곤란해하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사례를 들었다. “나에게는 김재순씨와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20년 전 한·일의원연맹 회장으로서 일본을 방문했을 일본 정치인 중에서 총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몇 명 만나고 싶다고 저에게 요청을 해왔습니다. 몇 명을 꼽아서 김재순씨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국대사관의 외교관이 ‘기자님 이런 거 절대 하지 마세요. 국회의장을 지내신 분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정치인을 만나는 건 체면이 안 섭니다. 모아서 같이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요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재순씨가 화를 내면서 ‘무슨 소리냐? 나는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면 한신처럼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는 것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저는 김재순씨의 왕팬이 됐습니다.”그는 요즘의 한·일 관계 문에 오히려 중요성이 더 커진 한·일 민간교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두 나라 간의 민간교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으나 그와 같이 요직을 지낸 기성세대가 민간교류에 나선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 자신도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제가 은퇴 후 한국에서 잡(job)을 구하게 됐다고 했더니 지인과 후배들이 모두 부러워하더군요. 저는 후배한테 ‘퇴직하면 너도 해라’고 권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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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