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에세이·Values·

"초한지" 유방의 속얼굴

雄河 2015. 12. 26. 12:50
"초한지" 유방의 속얼굴 


 

↑유방 (천다오밍 扮)                                  ↑항우 (허룬둥 扮)

 

 

↑여치 (친란 扮)                                                ↑ 장량 (궈청 扮)

 

 

KBS2 TV에서 "초한지" 24회가 방영되었다.
24회의 주요 씬은 유방이 항우로부터 군사 5천을 빌려, '배신자'  옹치를 치기 위하여 패현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진(秦)나라 말기 각지에서 제후국들이 궐기하여 난(亂)을 일으킬 때, 패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유방과, 초나라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막강 군사력을 갖추어 반란을 일으킨 항우는 처음에는 우호적인 관계였다. )


 패현에 입성하여 옹치를 체포한 유방은 이 '배신자' (옹치)를 참수하여 일벌백계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옹치의 목을 치지 못하고 결국 고민 끝에 옹치를 풀어준다.

 

유방은 무식한 농민-하급관리 잡패거리들을 이끌고 패현을 접수하여 진(秦)나라에 대한 항거의 거점으로 삼았었다. 그 패현을 심복인 옹치에게 관리를 맡기고 다른 지역을 평정하러 나갔는데, 그 사이에 옹치가 유방을 "배신하여"  패현 땅의 임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누가 유방이라 하더라도 패현을 되찾고 '배신자' 옹치를  응징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의 군사는 '오합지졸'이었고, 더구나 옹치는 유방의 아버지와 장인, 부인(여치), 자식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애타는 유방. 옹치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지만, 군세는 약하고 가족은 인질로 잡혀 있으니.. 

 

이 상황에서 유방이 항우을 찾아가 군사를 빌려달라고 간청하게 된 것이다. 항우는 유방을 본체만체하며 마굿간에다 재웠다.

 

유방, ㅋ~ 인내심 하나는 대단했다.

유방으로서는 참아야 했다.  마굿간에서 자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항우에 매달려 결국은 5천의 군사를 빌리는 데 성공하는 유방.

 

그리하여 패현을 탈환하여 저 '배신자' 옹치를 체포, 참수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유방은 옹치의 목을 치지 못했던, 아니 옹치의 목을 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유방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라고 할까.  유방은 진(秦)나라를 무너뜨려 전국을 제패하기 위해서는 패현을 장악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옹치와 같은 용맹한 장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비록 배신자 옹치를 "찢어 죽이고" 싶었을지언정 앞날을 생각하여 옹치를 살려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옹치는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두고 일대결전을 벌이는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유방을 도운 적이 있다. 여하튼 이 대목에서 유방의 앞을 보는 안목, '배신자'를 용서할 줄 아는 덕목----유방의 한(漢)왕조에서는 덕치주의 사상을 확립시켰다---- 등이 드러났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드라마 "초한지"는 분명 유방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중국인들의 의도가 엿보인다. 중국에서  '천하'를 통일한 통일제국은 사실 유방의 한(漢) 나라가 최초가 될 것이다. 진(秦)나라는 만리장성 축성을 위한 농민동원, 분서갱유 등에 인한 실정으로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진나라를 크게 내세워 선전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한(漢)나라에서 당(唐)을 거쳐 명(明)에 이르기까지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찬란하게" 꽃핀 시대였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대사(大使)'를 받았고 '조공'을 받치게 했다.  중국은 변경이나 동쪽에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동이(東夷)라 부르고 소화(小華)라 칭하기도 했다. 중원은 크지만 너희들은 작다(小)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그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유방을 깎아 내리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보기에는 유방이야말로 후안무치한 졸장부였다는 것이다. 다음은 시바 료타로의 해석이다. ----"항우의 추격에 놀라 자식들을 수레에서 집어 던지면서까지 살겠다고 버둥대는 모습이나, 영원한 평화를 철석같이 약속하더니 인질을 되찾자마자 물러나는 항우의 뒤통수를 치는 모습을 볼 때 유방이야말로 소인배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항우는 의리를 지킬 줄 알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장수였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배신한 옹치를 처단하겠다며 유방이 군사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자, 결국 항우는 그 '의협심' 때문에 군사 5천을 유방에 빌려줬던 것으로 보인다. 배신자 옹치를 처단하겠다는 유방의 그 다급했던 마음을 항우가 이해를 해 준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덧붙이고 있다. ----"유방에게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처럼  “간사한 최후의 승리자” 상이, 항우에게서는 미나모토 요시쯔네(源の義経) 같은 “비운의 영웅” 상이 엿보이고 있다."

 

또한편, 유방은 색(色)을 밝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막에서는 주모와 놀아나고 그 주모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기도 했으며 그 얘기를 또 이곳저것에서 떠벌이고 다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한나라를 세우고 나서도 잡다한 후궁들을 뒀다고 하니..  

황후 여치는 유방을 유혹한 여자들은 끝까지 찾아내어 보복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무서운 방법으로.. 한국영화 "서울무지개"에서도  ○부인 L씨가, '그 이'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어느 여배우에게 무섭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황후 여치의 수법을 본딴 것인가? ㅎ~ 

 

덧붙여 말하면, 유방은  항우처럼 솔직하게 부하들을 대하지도 않았고, 그 휘하의 장수들 끼리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도록 하여 분열되도록 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나중에 황후 여치는 한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명장 한신까지  음해하여 죽인다. 그 때, '홍문의 연' 등 어려 차례 죽음의 고비에서 유방을 구해낸 책사 장량도 여치가 무서워 시골로 도망쳐 살아가게 된다.

 

여치는 측천무후, 서태후와 더불어 중국역사상 3대(大) '악의 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초한지" 유방의 두개의 얼굴

        


    @ 2013/05/08 20:56  추천 1 스크랩 0

      

--------------------------------------------

ゝ포토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