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ham Parkes(ed.) Nietzsche And Asian Thought
The Other Nietzsche -Joan Stambaugh-
Ⅰ. 나찌에 의해 니체가 왜곡된 적도 있었고, Kaufmann 이전에는 니체가 단순히 미친사람의 狂氣를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이 글의 제목에서 「또 다른 니체(The Other Nietzsche)」라고 한 것은 니체의 詩적인 신비감(the poetic mystic)을 다루고자 함이다. 플라톤은 詩가 이성(reason)을 헤치는 것으로 보았으며, 진리(truth)를 찾기 위해 詩로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처럼 시적인 것에도 진리가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 이하 ‘짜라투스트라’로 약칭)』에서 짜라투스트라는 하늘(heaven)을 말한다. 이는 하늘에 있는 태양이나 별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the heaven itself)―그는 “빛의 심연(abyss of light)”이라 불렀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과 ‘빛의 심연’을 동일시 하는 데에는 역설(paradoxes), 모순(contradictions), 그리고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sitorum)로 가득차 있다. 즉, 하늘은 ‘위(above)’ 혹은 ‘밝은(light)’ 뜻의 개념인데 반하여, 심연(abyss)은 ‘아래(beneath)’ 혹은 ‘어두운(dark)’ 뜻의 개념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Ⅱ.『짜라투스트라』제3부 ‘On the Great Longing’에서 그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누워있지만, 잠들지 않고서, 계속 그의 정신(soul)과 대화를 한다. 그의 정신은 해묵은 가치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서, 4가지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1)하늘색 벨(azure bell)은 하늘과 빛의 심연이 일치ㆍ유사하다는 것을 뜻한다. 2)범위의 범위(circumference of circumference)는 포괄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정신(soul)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embrace all things)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시간의 탯줄(the umbilical cord of time)은 삶의 원천(source of life)에 시간이 모두 모이게 하는 것(time gathers all things together)을 말한다. 4)운명(destiny)은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을 뜻한다. 요구의 전환(Turning of need―???). Ⅲ. 니체에게 정오(noon)는 「無限 혹은 永遠(out of time, timelessness, and eternity)」의 개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무한하게 영원의 샘(the well of eternity)에 빠져있었다. 과거에는 빛의 심연(하늘)으로 날아가길 원했었고, 현재에는 영원의 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차원이나 영역(another level or realm)으로의 차원의 이동(a shift of dimension) 혹은 급작스런 전환(abrupt transition)을 나타낸다. Ⅳ. 자정(midnight)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자정의 벨(midnight bell)은 보통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다. 자정과 정오는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오의 경험은(the experience of noon)은 아폴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정오에 세상은 완벽(perfect)해진다. 따라서 정오의 심연(abyss of noon) 또한 영원의 샘(the well of eternity)이다.
Questioning one’s “Ow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Foreign -Eberhard Scheiffelf, translated by Graham Parkes-
Ⅰ. 니체에 대한 기존 연구는 니체의 시각(perspectivism)에 대한 주된 특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즉, 뒷편으로 떨어져서 살펴봄(hiterfragen; questioning from behind)으로써 자신이 가진 것(what is one’s own)으로부터 분리(estranging)시키는 방법―異國的인 시각―을 취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초기 저작인 Untimely Meditations에서 「문화와 인간의 플라스틱 파워(plastic power)의 개념은 과거와 이국적인 것(what is past and foreign)들을 통합ㆍ변형(transforming and incorporating)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니체는 오래되고 친숙한 것에 대해 멀리 떨어진 반대편(counter-position)에서 비판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이국적인 것으로 만들어 보는 작업을 되풀이 하였다. 이런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해 ‘정의를 실천(doing justice)’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보고자 하는 것(seeing one’s own anew from different perspective)이었다. 또한 친숙한 것(what is familiar)을 뒷편에서 살펴보는 것(get behind)은 분명한 것(what is obvious)을 뭔가 이채로운 것(something strange)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었다. Ⅱ. 니체는 당시의 독일을 과거와 비교하지 않고, 유럽과 비교하였다. Marx에게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이 진보(progress)였다면, 니체에게는 퇴보 혹은 쇠퇴(backwardness and obsolescence)였다. 니체가 외국을 소중하게 생각한 것(value)은 外國을 평가(measure)하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what is one’s own)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니체의 성향은 어떤 시각(perspective)이 열어주는 “길(route)”을 지향했던 것으로, 이를 “지적인 방랑주의(intellectual nomadism)”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Ⅲ. 니체는 보다 높은 관측점(higher standpoint), 그리고 보다 넓은 시각(broader perspective)으로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에게 이국적인 것으로는 무엇보다 헬레니즘(Hellenism)을 꼽을 수 있다. 그는 Daybreak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異國的인 헬레니즘(The Hellenic as Quite Foreign to Us)” 이라는 文句를 쓰고 있으며, 아시아 혹은 유럽보다 그리스가 더 異國的임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자유를 위한 희생, 정신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노예화, 자조(self-mockery)’ 등을 주장하면서 내면화(interiorization) 되었다. 반면 그리스는 심연을 벗어나(out of profundity) 표면화(superficiality)를 거쳤다. 그리스와 기독교는 결국 ‘디오니소스 對 그리스도(Dionysos VS. the Crucified)’의 대결로 표현되었다. 제국주의적 식민시대에 니체는 기독교의 神은 ‘사랑과 잔인함의 神(the God of love and cruelty)’으로 보았고 , 유럽인들에게 완벽한 神(the perfect God)은 전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Ⅳ. 니체는 그리스인을 아시아 최고의 후손이자 제자로 여겼고, 아폴론적인 헬레니즘(Apollinian Hellenism)을 완전히 변형시킨 디오니소스를 아시아의 신(Asian deity)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불교를 기독교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매김하였다. 플라톤 이후 주된 사조가 되었던 “세계의 논리화(logicizing of the world)”와 “합리성의 지배(dominance of rationality)”에 대해 니체는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니체는 불교의 “철학적 명쾌함(philosophical clarity)”과 높은 수준의 “지적 정신성(intellectual spirituality)”을 찬양하였다. Ⅴ. 니체가 異國文化를 높게 평가한 것은 단지 그들의 문화가 자연과 밀접하게 유대를 갖고 있다거나, 근원성(primordiality)이 있다거나, 혹은 도덕적으로 때묻지 않아서(morally unspoiled)가 아니다. 오히려 지적ㆍ예술적ㆍ실질적(practical)인 우월성(superiority) 때문이었다. 비록 니체가 외국을 보다 높게 자리매김했지만(ranks the foreign higher), 사실 그의 주된 관심은 외국의 시각(from the perspective of the foreign)에서 비판받는 “자신의 것(his own)”이었다. Ⅵ. 니체의 시각(perspective)은 단순히 철학을 포기하고, 문학(詩)을 선호함으로써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배인 것(eingefleischt: become incorporated)을 “꿰뚫어 보기(seeing through)” 위해서는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처럼 자신의 것(what is one’s own)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보다 많은 것을 보고, 좀더 공정하게(impartial)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되어 보고(to be party), 모든 가치에 대한 엄격하고 필수적인 시각(strict and necessary perspective-Optik)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시각을 얻는 데에는 거리(distance)와 높이(height)가 요구되어질 수 있다. 또한 떨어져서 자신의 뒤를 살펴봄으로써(hinterfragen: questioning behind) 이차원적인 시각(double vision)을 가질 수 있게 된다. Ⅶ. 1. 멀리 떨어져서는 보이는 것이 자신의 위치(one’s own horizon)에서는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감추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2. 자신의 위치로부터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전체적인 구조(overall structure)를 파악할 수 있다. 3.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더라도 “원래(aboriginally)” 자신의 위치에 남아있게 됨으로써, 자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차원적인 시각(double vision)”을 갖게 된다. 4. 이렇게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simultaneously seeing)”은 자신을 평가(evaluate)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5. 뒷편에서 살펴보는 것(hinterfragen)은 거리감(distance)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치의 높이(height)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시각(perspective)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6. 니체 사상(imagery)의 “논리(logic)”는 왜 그의 관심이 외국 그 자체(the foreign itself)에 있지 않았던가를 명확히 설명해 준다. 즉, 그는 관측점(standpoint)을 찾은 것인데, 이는 외국의 관점에서 자신의 위치(his own situation)를 되돌아 보기 위한 것이었다. @ 최원용
@ 2010/03/25 14:43 | ||
|
'정치외교학(総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와 동양사상 (6) (0) | 2015.12.23 |
---|---|
니체와 동양사상 (5) (0) | 2015.12.23 |
市民社会와 国家에 関한 諸理論 (0) | 2015.12.20 |
소련외교와 러시아외교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0) | 2015.12.20 |
니체와 동양사상 (3) (0) | 201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