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프리 보가드(Humphrey Bogart) 풀 무비 楽しく 감상
Beat the Devil(1953)
↑ Beat the Devil is a 1953 film starring Humphrey Bogart and directed by John Huston. The screenplay was written by Huston and Truman Capote, loosely based upon a novel of the same name by British journalist Claud Cockburn, writing under the pseudonym James Helvick. It was intended by Huston as a parody of The Maltese Falcon (1941), also directed by Huston, and films of the same genre. (2013/03/13 Youtube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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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Humphrey DeForest Bogart
1899.12.25 ~ 1957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
전설적 인물, 최고의 터프가이, 최상의 대사를 내뱉는 최고의 영화배우, 최고의 남자,"보기 Bogie"의 트레이드마크인 혀 짧은 발음
The Harder They Fall(1956)
The Desperate Hours(1955)
We're No Angels(1955)
The Barefoot Contessa(1954)
Sabrina(1954)
The Caine Mutiny(1954)
Beat the Devil(1953)
The African Queen(1951)
Sirocco(1951)
In a Lonely Place(1950)
Knock on Any Door(1949)
Key Largo(1948)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1948)
The Big Sleep(1946)
To Have and Have Not(1944)
Passage to Marseille(1944)
Sahara(1943)
Casablanca(1942)
The Maltese Falcon(1941)
High Sierra(1941)
They Drive by Night(1940)
Dark Victory(1939)
Angels with Dirty Faces(1938)
Dead End(1937)
The Petrified Forest(1936)
The African Queen(1951)
The Caine Mutiny(1954)
Casablanca(1942)
험프리 보가트는 전설이다.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가 1999년에 시행한 조사를 비롯하여 몇 가지 여론조사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그를 가장 위대한 배우로 지목했다. 보가트 자신도 인정했듯이 그가 한 연기 대부분이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는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린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의 재능에 대한 증명이다.
보가트는 언제까지나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 분명한 몇 편의 고전 영화에 출연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평범한 수준의 연기도 많지만, 또 존 휴스턴 감독이 말했듯이 비록 그의 배우 생활이 스스로 자초한 날카로운 언사와 불같은 성미와 바람기 많은 보가트라는 페르소나 때문에 고충을 겪은 것이 사실이라 해도, 스크린에서 보는 그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풍자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그의 동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가 붙여준 별명 '보기'는 모든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다.
외과의사와 광고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에서 태어난 보가트는 거의 40세가 되어서야 배우로서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다. 학생 체질이 아니었던 그는 1918년에 명망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쫓겨났다. 해군예비군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밤에 펼쳐지는 화려한 생활에 매료되어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브로드웨이에서 작은 역할을 연기하다가 영화로 옮겨 갔다. 그의 1930년대는 특출한 연기도 없이 여러 갱스터나 터프가이들 중 하나로 등장하거나 특별히 뛰어나게 연기하지 못한 채 판에 박힌 역할들을 맡았던 서른 편 이상의 B급 영화로 채워졌다. 보가트는 워너브라더스사가 제임스 캐그니 같은 대스타들이 거절한 2등급 배역만 자신에게 떠맡긴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출입금지(1937)」와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1938)」, 「데이 드라이브 바이 나이트(1940)」도 기억에 남지만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하이 시에라(1941)」였다. 이 영화의 공동 작가였던 존 휴스턴은 「말타의 매(1941)」에서도 보가트를 제대로 활용했다. 그러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전쟁 드라마 「카사블랑카(1942)」는 그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한 팀으로 만들었다. 망명한 미국인 클럽주인 릭 블레인으로 보가트가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영화사에 그의 자리를 확고히 새겨놓았고, 로맨틱한 주연으로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가 표현해낸 냉담하고 냉소적이지만 아직 사랑과 양심을 잃지 않은 남자의 모습은 배우로서의 깊이를 보여주었고 여린 가슴으로 괴로워하는 터프가이 역도 연기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 영화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대중이 직면하고 있던 감정적 딜레마를 잘 포착해냈다. 또한 이 영화는 보가트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이후 수없이 패러디된, "여기서 당신을 바라보며"를 비롯한 몇 가지 대사를 말할 기회도 주었다. 사실 이 대사는 그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대본에는 없었던 대사인데 촬영 사이사이 보가트가 버그만에게 포커를 가르쳐주던 도중에 나온 대사라는 것이다.
카사블랑카 이후의 삶과 사랑
그러나 그 후 하워드 혹스 감독과 자신의 실제 연인 로렌 바콜과 함께 만든 두 편의 영화 「소유와 무소유(1944)」와 필름 누아르의 아이콘 「빅 슬립(1946)」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다. 보가트와 바콜의 영화 밖 로맨스는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지면서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켰고 혹스는 몇 장면을 더 추가해 그 효과를 더욱 잘 살려냈다.
그 뒤에도 탁월한 역할들이 뒤따랐다. 보가트는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1948)」과 「키 라르고(1948)」 그리고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아프리카의 여왕(1951)」, 「비트 더 데블(1953)」에서 또다시 휴스턴 감독과 함께 일했다. 그러나 보가트 최고의 연기는 자기 소유의 영화사에서 제작한 「인 어 론리 플레이스(1950)」라는, 낮게 평가된 스릴러에서 볼 수 있다.
「낙 온 애니 도어(1949)」에서 함께 작업했던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다시 뭉쳐 만든 이 영화는 분노와 자기혐오와 격심한 위기에 봉착한 남성의 정체성에 관한 강렬한 탐구였으며, 여기서 보가트는 자신의 성미를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시나리오 작가를 연기했다. 이 작품은 보가트가 자신의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으며 어떤 역할에서도 그 '보기 Bogie'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하리라던 생각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휴스턴 감독과 함께한 작품들을 제외하면 50년대의 작업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그는 네 번째 아내인 로렌 바콜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195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썽꾼 보가트
"스카치에서 마티니로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보가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술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할리우드를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 어느 밤 비벌리힐스의 한 회원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난 보가트는 동행한 피터 로리와 함께 그 레스토랑의 거대한 금고를 굴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도로에 내다놓았다.
· 그는 비벌리힐스의 로마노프에 자주 갔는데, 부절적한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 주인을 골려먹기 일쑤였다.
· 보가트는 영화산업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고 동료 배우와 감독들을 서슴지 않고 비판했다. "그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된단 말인가?"
· 배타기를 즐기는 그는 불같은 성미의 셋째 아내 마요 마토트를 따라 한 보트의 이름을 '슬러기'라고 지었다. 언론은 그 부부를 '전쟁하는 보가트 부부'라고 불렀다.
· 1950년의 늦은 밤, 친구 빌 시먼과 거대한 팬더 인형 두 개를 가지고 뉴욕의 엘 모로코 클럽을 찾아갔다. 보가트는 4인용 테이블을 요구했고 팬더 인형들을 '데이트 상대'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그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쫓겨났다. "술이 취했었나요?"하고 묻자, 그는 "새벽 세 시에 안 취한 사람도 있소?"하고 대답했다.
· 보가트는 할리우드의 술친구모임인 '랫팩'을 창단한 장본인이었다.
"연기는 섹스와 같다. 하고서 그에 관해 말하지 않거나, 그에 관해 말만 하고 실제로 하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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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899년에 태어난 그는 그다지
오랜 삶이 아닌 195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눈부시죠. 험프리 보가트라는 이름으로 쉽게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갱스터 무비'
입니다. 그는 필름느와르 영화의 상징적인 존재였죠. 그가 많이 활동하던
1940년대가 필름느와르 영화의 최고 전성기 시절이기도 했죠.
공연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174cm나 되기 때문에 키의 높이를 맞추기 어려웠다고 하니.
그리고 얼굴도 다소 길쭉하면서 악당의 이지미가 풍겨나오는 결코 잘 생긴 외모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그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서 개성넘치는 성격파
배우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오가는 배우였습니다. 1936년 37세에 출연한 영화 '화석의 숲(The Petrified Forest)'에서
주목받기 전까지는 험프리 보가트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죠.
1937년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영화 '죽음의 거리(Dead End)'에서 그는 꽤 인상깊은 악역을
연기해냈습니다. 서서히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던 시기죠. 그는 1930년대 후반 갱스터영화의
전설배우인 제임스 캐그니와 몇편의 영화에서 공연하면서 본격적인 자신의 위치를 갖추기
시작했죠.
있습니다. 42세의 나이때였으니 그는 상당히 대기만성형 스타라고 할 수 있죠.
1941년 그는 '하이 시에라'와 '말타의 매'라는 걸출한 필름느와르 걸작에 연달아 출연했습니다.
특히 '말타의 매'는 '최초의 필름 느와르 영화'라고 불리울 만큼 그 장르의 '상징적인 걸작'이자
40년대 미국영화를 대표할 작품입니다. 배우로 활동하던 존 휴스턴의 '감독데뷔작'으로 이
작품은 험프리 보가트와 존 휴스턴 두 사람을 모두 뜨게 만들었죠. 이후 험프리 보가트의
행보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습니다. 1년뒤에 '영화사에 길이 남을 멜러물의 걸작'이 되버린
'카사블랑카'에 출연하여 최고의 스타자리를 굳히게 되었죠. 이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말한 '그대 눈동자에 건배를'이라는 대사는 영화의 명대사가 되었죠.
로렌 바콜과 공연한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 명탐정 필름 말로우 역으로
출연한 '빅 슬립'등에 연달아 출연하게 되며, 미국을 대표하는 선 굵은 하드보일드파 영화의
주연배우로 자리를 굳히게 되죠. 말타의 매에 출연한 1941년부터 '시에라마드레의 황금'에
출연한 1948년까지는 그야말로 험프리 보가트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죠.
하고 1957년 사망할 때까지 12년을 같이 살았죠. 무려 25살이나 나이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40대중반의 험프리 보가트가 20대 초반의 로렌 바콜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얼마나
높은 스타의 위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었죠. 소유와 무소유 외에도 '빅 슬립' '다크 페세지'
'키 라르고' 등 로렌 바콜은 초기의 영화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여러차례 공연을 했습니다.
또한 그 영화들이 모두 볼만한 작품들이었죠.
에서는 명배우 캐서린 헵번과 공연하였고,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위험한 항로'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Beat the Devil'에서 존 휴스턴
감독과 다시큼 호흡을 맞추었고, 1954년에는 그의 후기 대표작이 된 '케인호의 반란'에
출연하여 광기어린 함장역을 보여주었죠. 1954년에는 세기의 여배우들과 연달아 공연을
하였습니다. 20세기의 요정인 '오드리 헵번'과는 사브리나에서, 50년대를 대표하는 요염한
배우 '에바 가드너'와는 맨발의 백작부인에서 함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키 작고 볼품없는 못생긴 남자배우가 로렌 바콜이라는 지성넘치는 25세 연하의 미녀와 함께
사는 것 외에도 최고의 여배우들과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연할 정도이니 험프리 보가트는
정말 능력도 많고 여복도 많은 배우였죠.
탈주범역을 맡아서 광기어린 악역의 명연기를 해냅니다. 악역으로도 잘 어울리는 험프리 보가트는
'시에라마드레의 황금' '죽음의 거리' '케인호의 반란'등에서 악역으로 영화를 빛나게 했죠
적나라하게 다룬 작품인 '비정의 링(The Harder They Fall)'에서 비리를 고발하려는 기자역으로
출연한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맡아서 많은 영화에서 열연했던 험프리 보가트는 '얼짱'이 아닌 배우라도 얼마든지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일급 미모의 여배우들과 로맨스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명배우입니다.
명화들과 함께 오래오래 영화인들에게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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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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