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윤석중은 열 살(1921년)이 되어서야 교동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일본말을 배우는데 일본노래 ‘봄이 왔네(春が来た)’에서 모티브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쓰게 된다. ‘봄이 왔네’라는 이 노래는 우리말로 하면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 왔나, 산에 왔네, 마을에 왔네, 들에도 왔네.”이다. 윤석중은 학교에서 야단을 맞으며 “봄이 왔네”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 노래를 못 부른다고 선생님께 혼나면서 ‘우리나라에도 버젓이 봄이 있는데 하루(봄春의 일본말)가 다 뭐람’ 하는 생각이 들어 배울 때마다 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따뜻한 봄이 오니 울긋불긋 꽃봉오리, 파릇파릇 풀잎사귀”로 시작되는 ‘봄’을 쓰게 되고 이 시가 <신소년>에 뽑힌다. <신소년>에서 일찍 문학성을 인정받은 어린이 윤석중은 1923년 [상록수]를 지은 심훈의 조카 심재영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만든다. 1925년에는 초등학교(학제 5년)를 1년 월반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양정고보에 들어간다. 그해 <어린이>(1925년 4월호)에 ‘오뚝이’가 입선으로 뽑힌다.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고나야/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비틀비틀 하는꼴 우습고나야”로 불리는 ‘오뚝이’는 거드름이나 술기운을 빌린 으스댐, 떨어져도 안 아픈 척 체면 차리는 당대 어른들의 모습을 오뚝이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같은 해 8월 15일에 윤석중은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일 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보게 된다. 회람잡지<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잡지 굴렁쇠”라고 쓰고 각자가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일을 작은 편지에 곁들여서 원고를 묶었다. 이 원고를 서울의 윤석중이 진주의 소용수에게 보내면 소용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 마산의 이원수에게 보내고, 이원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서 언양의 신고송에게, 신고송이 울산의 서덕출에게, 서덕출이 수원의 최순애에게……이렇게 한 바퀴 돌아가면 다시 윤석중에게 오는 것이다. 그때 동인으로는 진주의 소용수, 마산의 이원수, 언양의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 수원의 최순애, 그리고 원산, 북청, 김천, 안주, 신천에도 동인들이 있어서 글을 실은<굴렁쇠>는 우리나라 남북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또한 같은 해 11월부터 윤석중은 <어린이>지 부록이었던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리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고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일하게 된다.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가’ 부분
위의 시는 1926년 양정고보 2학년 때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된 ‘조선물산장려가’이다. 이 시가 당선되면서 윤석중은 천재적 어린이 예술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윤석중은 이후 왕성하게 시창작 활동을 한다. 1927년 여름방학에는 ‘봄편지’를 쓴 ‘굴렁쇠’의 동인인 울산의 서덕출을 만나러 떠난다. 서덕출은 척추장애가 있는 소년이었다. 서울에서 윤석중이 내려온 것을 안 ‘굴렁쇠’ 동인 언양의 신고송, 대구의 윤복진이 합류하여 네 사람은 굴렁쇠처럼 돌아가며 한 소절씩 시를 쓰게 되는데 이 시가 “오동나무 비바람에/잎떠는 이 밤/그립던 네 동무가/모였습니다.//이 비가 개이고/날이 밝으면/네 동무도 흩어져/떠나갑니다.(중략)” 하는 ‘슬픈 밤’이다. 양정고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는 신문에 윤석중의 시가 연달아 발표된다. 어느 날 윤석중(尹石重)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윤석동(尹石童)으로 잘못 인쇄된다. 중(重)자가 동(童)자와 비슷해서 생긴 일인데 이를 보고 “석동(石童)이라는 아호가 좋소, 누가 지었지?” 하는 춘원의 칭찬에 석동(石童)은 그의 아호가 된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운동이 발발하면서 윤석중은 그들과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보를 졸업 며칠 앞두고 자퇴한다. 1930년 가을에는 19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한다. 1932년 7월 20일 첫 창작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신구서림, 1932)을 출간하고 1933년에는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하며 방정환이 맡았던 잡지 <어린이>의 주간이 된다. 1935년 9월 10일에는 독립 운동가이며 조선건국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던 여운형의 주례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결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