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문화-·세계문화

북한의 종교 -- 북한의 기독교 역사

雄河 2015. 12. 23. 17:31

북한의 종교


<북한의 기독교 역사>

양 은주 (Kyung-nam University)


1. 북한의 종교 (북한의 기독교 역사)


북한의 종교는 8·15광복 전 개신교·가톨릭 등 서방종교가 남한보다 먼저 전래되었고, 불교·천도교 등 전통종교도 교세가 성하여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종교의 영향이 깊숙히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8·15광복 이후 종교는 아편이라고 주장하면서 적대적 입장을 나타낸 공산주의적 종교관의 영향을 받은 김일성의 종교관에 따라 반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결과, 1955년경에 이르러서는 북한 지역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은 사라졌거나 지하화되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었다. 북한에 종교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회담과 상호방문이 실시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즉 북한은 1972년에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북한 내에도 종교활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 동안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한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을 재개시키는 한편, ‘조선천주교인협회’ ‘조선종교인협의회’ 등의 종교단체를 신설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 종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로서 그 계기는 해외교포 종교인들의 빈번한 방북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북한은 교포 종교인을 적극 초청하는 가운데 이들과 종교인회담 및 해외에서 반한종교인집회를 갖는 등 통일전선전략에 치중하는 한편 사찰복원과 법회 개최, 성당·교회의 건립과 종교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북한은 헌법 제68조에서 구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반종교 선전의 자유’ 부분을 삭제하였으나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는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여전히 종교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지금부터 볼 내용은 북한의 종교 중에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http://nkculture.ac.kr/Body/BBS.asp?TB=free&Mode=V&Num=4772&Page=25

2. 해방전 북한 기독교 상황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신사 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섬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전국적으로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거나 투옥되었고 주기철, 최봉석, 최향림 목사 등 50여명이 순교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되면서 일제는 각 기독교 교파의 고유명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강요하는 한편, 일본 기독교단의 예하인 조선 교단이라는 어용 단체를 조직하였다.일제의 기독교 탄압 결과 당시 70여 만의 신자들이 거의 반수로 줄어들었다. 8.15 해방과 더불어 각 교단에서는 교회 재건과 각종 단체 결성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3. 기독교 활동 제한시기 (1945년~1950년)



이 시기는 북한 김일성 집단이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정책을 실시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종교 활동에 제한을 가하던 시기이다. 그 이유는 김일성 공산당의 세력이 약했으며 북한 토착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지역의 기독교는 막강한 정치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인사들의 잠정적인 협력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행하는 종교 활동 제한은 교회, 성당, 사찰 등 종교 시설들을 그대로 묵인하면서 그곳에서 대규모 공식적인 종교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였다. 예컨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이웃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하지만 공산당은 그 가운데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에서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에 비해 집중적으로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우선 기독교 단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 전도 등 활동에 필요한 경제적 입지 여건을 박탈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1946년 토지개혁 조치를 단행해 무상으로 토지를 몰수했으며 1948년에는 ‘중요 산업 국유화 정책’을 시행하여 기독교인에 대한 억압을 본격화 하였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의 저항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을 내세워 어용 기독교 조직인 조선기독교도연맹(1946.11)을 결성하여 김일성 정권에 대한 지지운동을 강요하였으며 기존의 민간종교 조직을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4. 철저한 탄압시기(1950년~1953년)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종교의식이 발각되기만 하면 모조리 체포하였고 수시로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여 종교 관계 서적만 발견되어도 이를 불온문서로 취급하여 연행하는 등 직접적인 탄압 조치를 시작하였다. 이 같은 조치는 6.25 남침 준비의 일환으로써 후방의 공고화를 도모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다. 6.25 동란은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으로 다가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당국은 교직자들을 대거 체포하였다가 그들이 후퇴하는 시점에서 “모두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였다. 기독교인들은 양심에 따라 공산집단에 저항했고 국군 및 유엔군이 다시 후퇴할 때에 이들을 따라 대거 남하했다. 전쟁기간 중 월남자가 얼마나 되는지 불분명하지만 기독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이 많이 월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또한 그 때까지 방치해 두었던 종교 관계 건물들을 파괴해 버리거나 구조를 변경하여 군수 물자 창고 등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교회당과 예배당 부근에 못 쓰는 대포나 전차 등을 내버려 둠으로써 고의적으로 공습의 표적이 되게 하는 등의 교활한 수법까지 동원하였다. 이 당시 종교 건물이 미군의 공습에 의해 폭격당하는 것을 목격한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당국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도록 했으며 미국의 공습과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미국의 공습에 대한 공포와 분노는 미국의 종교로 전이되었으며 기독교인은 미제국주의자의 앞잡이들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북한 정부는 이점을 북한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두고두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정권은 6.25전에 기독교를 철저히 소탕하려 했으며, 6.25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잔존 기독세력을 철저히 숙청했다. 그 당시 많은 북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숙청됨에 따라 북한 기독교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을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탄압을 본격화 하였고 그 후 기독교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5. 지하교회 색출시기(1954년~1971년)



남침전쟁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북한은 1955년 4월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반공세력을 근절할 목적으로 ‘계급교양’을 강화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계급교양’이란 바로 유신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신론에 입각한 사상교육을 뜻한다. 직장, 사회단체, 부락별로 회의를 열고 평소에 공산당의 시책에 회의적인 사람과 월남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군중의 압력으로 기독교나 자유의사를 자백케하는 대중고문이 바로 계급교양이다. 따라서 그나마 잔존하였던 기독인들은 지하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지하에 숨어있는 기독교인들을 포착하기 위해 1958년 ‘중앙당 집중지도’를 시행하여 북한의 모든 주민들을 한사람씩 성분을 분석하였다. 그 집중 지도에 의해 많은 지하 기독교 단체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로는 이만화 목사 사건이다. 1954년부터 농업의 개인 경영이 금지되고 집단 농장이 강제 운영되자, 이 목사도 농장원으로 강제 편입되어 일하게 되었고 신임을 얻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한편, 이 목사는 한사람 한사람 접촉하면서 기독교적인 신앙을 꾸준히 가르쳤다고 한다. 많은 지하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휴전 후 3년 동안에 평북 용천군내 10여개 협동농장에 비밀조직이 형성되고 2000명이 넘는 신도가 조직되었다. 어떻게 교묘히 조직되었는지, 그들의 비밀교회는 공산주의자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고 한다. 이 목사의 지하교회 예배는 격식을 차리지 않았으며 농장에서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삼삼오오 흩어져 논두렁에서 쉬고 있을 때 행하였고 그 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소조원들이 잡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성경 이야기를 하고 머리를 숙임이 없이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평북의 용천군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어떤 부락에서는 인민위원회 간부까지 지하교회에 가담했다고 한다. 이상하다고 판단한 북한은 비밀경찰 즉 사회안전원들 300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명을 용천군에 급습시켜 어느 주일에 결근한 농장원들의 가정들을 일제히 검색하였다. 그 중 두 신도의 가정이 예배를 보고 있었고 그 현장이 발각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해 이만화 목사가 자진 출두하여 지하교회의 책임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20여명의 신도와 함께 순교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만화 목사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말살정책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였으며 지하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광분하였다.
59년에는 노동당 출판사에서 펴낸 정하철의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라는 공산당의 반종교 지침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 탄압 정책을 분명히 했다. 첫째,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북한을 배반하고 월남하였다. 둘째, 북한군이 후퇴할 때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단체들은 국방군과 UN군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셋째, 일부 기독교인들은 미군을 소위 ‘하나님의 군’이라고 떠벌이면서 기독교의 막뒤에서 공산당과 공산혁명을 반대했다. 넷째, 북한기독교인들은 인민군 입대를 기피했으며 반공 게릴라 활동의 선두에서 싸웠다. 이상과 같은 기독교 탄압 이유를 살펴보면 북한 정권은 기독교를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처형하려는 의사를 확실히 갖고 있었다.
북한은 기존 교회 시설을 몰수하여 공산당 회의장, 유치원, 선전장으로 전용시켰고 평안남북도에 밀집되어 있던 예배당은 단 1개소도 남기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북한은 잔존 기독교인을 색출, 사회적으로 격리시켜 관리했다. 또한 북한은 소위 ‘주민등록 사업’(67년~70년)에 의해 51계층으로 분류하였으며 종래의 종교인들에게는 독립된 별개의 분류번호(기독교인 42, 불교 신자 43, 천주교 신자 44)를 부여하여 일반감시 및 특별 감시대상으로 구분하였다.


6. 신앙생활 위장기(1972년~1980년)



북한은 동서의 데땅뜨 흐름에 따른 남북간에 해빙기운이 나타나자 종교를 위장하기 시작했다. 1972년 남북대화가 이루어지고 긴장이 완화되고 개방화로 치닫는 국제 환경 질서 속에서 북한은 그들의 교조만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했던 이른바 ‘기독교도연맹’, ‘천도교중앙본부’, ‘조선불교도연맹’ 등이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유령단체의 이름이나마 남겨둔 것은 소위 대남 전략상 남한 종교인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종교단체의 결성 및 활동에 목적을 두었지 종교 활동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이와 같은 사이비 관제 어용 종교단체는 첫째, 종교 말살 정책에 앞장 세워 지하종교인 색출에 이용하며 둘째, 마치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위장물로 이용하고 셋째, 한국 종교인들을 반정부 투쟁에로 선동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72년 8월,9월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적십자회담의 한국대표단 수행기자들을 통해 밝혀진 전직 목사로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부주석이었던 강양욱(1982년 사망)과의 대담을 소개됨으로서 당시 북한 기독교의 실태를 엿볼 수 있었다. 강양욱에게 “어찌하여 북한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느냐, 북한에는 기독교가 있는냐”고 질문하자 강양욱은 “미 제국주의자가 도발한 6.25 침략 전쟁에 미제의 폭격으로 교회가 다 불타고 파괴되어 없어졌다. 따라서 신앙을 포기한 자가 많아서 믿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전 시기와 비교해 북한 종교인들의 통일전선사업이 대폭 증대되었으며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강양욱 목사는 1972년 9월 남북한 기독교인의 직접접촉을 제안하면서, 남한내 민주화 사건과 관련한 비난 성명과 호소문을 발표하는 등 대남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적인 종교 단체에 침투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 첫 번째 시도가 1974년 8월 ‘조선기독교도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독교회협의회(WCC)에 가입 신청을 내었다. 그러나 WCC 측은 북한 지역 내의 정확한 기독교 실태를 파악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가입을 거부하였다. 그 후 북한은 1976년 공산권 국가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 평화 회의(CPC)에 가입하여서도 ‘조선에 관한 결의문’과 ‘성명’을 채택하여 한국을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는 정치적인 활동만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종교의 위장선전 활동을 통하여 해외 동포 및 해외 종교인들을 포섭하는 활동도 벌여 나갔다.
북한에서 소위 불필요한 ‘중앙 종교 조직’을 굳이 유지해야 하는 이유와 그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1975년 하달된 김일성의 “비밀 교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종교를 반대하면서도 왜 중앙에 종교 단체를 조직해 놓고 있는가고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많은 종교인들이 있으므로 우리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를 반대하는 적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많은 외국인들과 재일동포들은 우리에게 종교를 왜 믿지 못하게 하는가고 묻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종교는 허용하지만 인민들이 각성되어 믿지를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 조국 남반부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가 종교인들을 다 죽인다고 생각을 하면 그들도 우리를 반대하는데 합세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불필요한 중앙종교 조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7. 신앙자유 선전기 (1980년~현재)



대내적으로 주민들에 대한 기독교 탄압을 지속하고 있는 가운데 1980년 9월 미국 퀘이커 대표단을 시발로 서방권 국가 종교 단체에 문화 개방. 종교를 통한 평화 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 종교인 및 해외교포 방북시에는 성경책, 찬송가를 배포하는 한편, 사전 준비된 장소에서 예배를 주선함으로써 마치 기독교 활동을 보장하고 있는 듯이 선전하고 있다. 이와함께 그들은 소련 및 동구권 국가의 종교 완화 정책에 부응하고 89년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 및 교포 종교인, 외국인 방북이 집중함에 따라 우리 종교계와의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종교 시설을 복원, 신축하면서 각양의 대남 정치 선전을 전개하고 있다.
북한은 기독교가 하나의 대외적 선전도구로서 이용가치가 있을 때에는 그 존재를 강조하지만 대내적으로는 형법 및 조선 노동당 규약등의 규범으로 주민들을 기독교와 격리시키고 기독교에 대체하여 새로운 하나의 종교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주입시키고 있다



8. 마무리 하면서



나도 기독교인으로써 교회를 다니지만 막상 북한 문예에 대해 여러 자료를 검색하전 중 북한의 종교 기독교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이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 위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면 북한은 종교자체를 사회주위에 아편같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기위해서 굉장히 형식적으로 성당이나 절 교회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어떠한 절대자에게 마음을 바치는 것은 곧 신성시되는 김일성에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임으로 좋아할 리가 없다. 특히 기독교와 천주교 같은 종교는 인간의 평등사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북한체제로 보기에는 상당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북한의 종교는 있더라도 다분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이 된다. 절, 성당, 교회 같은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주변 국가에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생각 된다.

@ 양 은주


2010/06/17 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