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believable)생명을 파괴하는 피카소의 여성 편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11.22 00:05
[월간중앙] ‘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 10~20대의 여성 7명과 동거하며 창작의 동력을 얻었지만 여성들은 모두 불행에 빠져… 그의 젊은 여성에 대한 집착은 성적 도착일까,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최근 우연히 말디브(Maldives)란 나라에 대해 알게 됐다. 인도 바다 왼쪽에 위치한, 1192개 섬으로 구성된 작은 나라다. 인구 320만 명에 관광이 주된 사업이다. 계기가 된 것은 워싱턴 세계은행에 다니는 50대 남성을 통해서다. 말디브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간 경제분석가로 일하고 있다. 인도계로 얼굴이 검은 편이다. 인도는 물론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말디브는 16세기 들어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식민지로 나선다. 아시아·유럽·인도의 영향을 동시에 입은 초미니 글로벌 국가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의 집까지 방문하게 돼 부인도 만나게 됐다. 부인 역시 세계은행에서 경제전문가로 일하다가 5년 전 명예 퇴직을 했다. 니카라과 출신으로 원래 스페인계다. 흥미로운 것은 부인이 필자에게 던진 첫 질문이다. “한국인은 부인을 한 명만 둔다던데 당신도 그러한가?” 세계은행에 근무했다면, 적어도 글로벌 차원의 지식인에 해당된다. 낯선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해, “니카라과 남자는 부인을 몇 명까지 두느냐”고 물어봤다. 70대 초반인 자신의 아버지의 경우 ‘부인 여섯 명’을 기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부자이기에 부인 여섯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되물었다. “한꺼번에 여섯 명이 아니라, 이혼하거나 별거한 뒤 다시 결합하는, 동거를 포함한 수다.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여섯 명의 여성과 살림을 차려왔다. 네 번째 부인은 나의 대학 동기생이었다. 현재는 내 딸보다도 어린 스물두 살 부인과 살고 있다.”
필자가 놀란 것은 여섯 명의 부인을 거친 아버지에 대한 딸의 반응이다. “니카라과만이 아니라, 남미의 능력 있는 남성들은 부인이 많다. 쉽게 이혼하고 새로운 부인을 얻는다. 전(前) 부인들끼리 만나 친구도 되고, 결혼식에 가서 함께 축하해주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 니카라과, 나아가 남미의 결혼관에 대해 알아봤다. 결론은 이혼·결혼·동거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라는 점이다. 근본적인 출발점은 스페인에 있다. 아프리카를 마주한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비롯된 문화다. 스페인 전역이 기독교의 땅으로 굳어진 것은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그라나다가 스페인 여왕 이자벨라에게 함락된 때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선(戰線)에 해당된다. 스페인 남부 지명 어딘가에 붙어 있는 ‘프론테라(Frontera)’라는 말은 바로, 전장(戰場)의 전선이란 의미다.
스페인 남부의 자유분방한 결혼관의 영향?
역설적이지만, 서로를 증오하는 전쟁은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최적의 멜팅 포트(Melting Pot)가 되기도 한다. 의식주에서부터 피(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이슬람의 모든 것이 섞이게 된다. 방어선으로 지켜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스페인을 멸시하고 조롱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폴레옹은 말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면 아프리카다.” 프랑스는 이슬람문화와 혼혈로 가득 찬 스페인을 야만인으로 대한다. ‘신성한’ 기독교의 순수성을 저버린 저급문화로 폄하한다.
스페인 남부가 결혼·이혼·동거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전쟁에서 비롯됐다. 수백 년 동안 이뤄진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남성의 수가 급감한다.
쉽게 말해, 미망인이 된 부인의 수가 넘치고 넘친다. ‘성전(聖戰)’에 대비해 새로운 전사(戰士)가 필요하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남성들을 통해 미망인을 포함한 여성들의 ‘자식농사’가 정착된다. 무슬림을 본받아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독식(?)하지는 않는다. 결혼한 뒤 이혼하거나, 집 밖에 아지트를 둔 채 동거하는 식이다. 집을 지키는 부인은 단 한 명만 존재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일부일처제지만, 순환식 결혼관이라 볼 수 있다. ‘야만인 이교도’ 무슬림의 합법적 일부다처제와는 다른, 다소 문명적인(?) 결혼관이다.
프랑스·독일·영국이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보겠지만, 전선을 맞댄 스페인 남부 주민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발전시켜나간다. 1492년은 그라나다가 함락된 해인 동시에, 콜럼버스가 스페인 배를 타고 신대륙을 발견한 때다. 스페인에 의한 식민지 개발이 16세기 들어 본격화된다. 여섯 명의 부인을 전전한 니카라과 70대 남성의 결혼관은 바로 16세기 스페인 전통에 기초한 문화다. 식민지 개발을 위해 들어온 스페인 남성들의 순환식 일부일처제 전통이 21세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물두 살의 새 어머니에 대한 문화적·윤리적 이질감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환희는 피카소의 몫, 고통은 여성의 몫
순환식 일부일처제 결혼관을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 낸 유명인사를 손꼽으라면, 누가 먼저 머리에 떠오를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다. 피카소는 평생에 수많은 여성을 전전한 인물이다. “나에게 여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 여신(Goodness)이거나, 집을 지키는 문지기(Doormates)이다.” 피카소가 평생 동안 찾아 헤맨 여성은 정신과 육체 면에서 완벽한 여신에 국한된다. 수백 명이 오르내리는 피카소의 여인은 그 같은 여신찾기 여정(旅程)의 수확물에 해당된다. 사실 남성치고 한때 여신 찾기에 나서지 않는 인물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나 범인(凡人) 에게 여신찾기는 얼빠진 스캔들에 불과하다. 로맨스를 찾아 여성을 전전한다고 말하겠지만, 세상은 그 같은 변명에 응하지 않는다. 피카소가 21세기에 태어 났다면 여신찾기 로맨스가 아닌, 정신 나간 늙은이의 노망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피카소의 여신찾기가 장밋빛 스토리로 받아들여 지는 이유는 주인공이 바로 피카소이기 때문이다. 범인이 아니라, 20세기 예술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최고 인기의 예술가라는 점이 ‘고상한 연애 무용담’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이유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기도 하지만, ‘보통사람이 하면 성도착 파렴치범, 예술가가 하면 환상의 세계’라 해석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여신찾기 여정은 보통 일곱 단계, 즉 일곱 명으로 나눠진다. 비교적 오랫동안 관계를 가지면서 동거·결혼·이혼을 반복하면서 거쳐간 여성이 일 곱 명이다. 수많은 여성과 만난 피카소지만, 베니스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와 같은 이미지와는 구별된다.
이유는 역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세상의 규범을 무시할 때 활용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상의 틀을 뛰어넘는 ‘비상식의 상식’인 동시에,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목을 조이는 고통이나 비극으로 변할 수도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처절한 삶은 예술세계가 가진 양날의 칼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다.
피카소와 일곱 여성의 관계를 보면, 환희와 행복은 피카소가 독식하고, 고통과 비극은 일곱 여성의 몫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일곱 여성 가운데 두 명이 자살하고, 두 명은 정신병자가 된다. 40세 연하의 여 성도 만났지만, 피카소보다 오래 산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하다. 자신과 만났던 여성이나 남성이 자살했거나, 정신병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을 경우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피카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듯하다. 8년 동안 함께 생활한 여성이 정신병동에 들어가는 순간, 42세 연하의 여성과 동거에 들어간다. 결핵으로 거동도 못하는 여성을 집에 둔 채, 새로운 여성과의 향연에 빠져든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 남부 말라가(Malaga)이다.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관문인 영국령 지브롤터(Gibralta)에서 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해안도시다.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날밤을 샌, 기독교의 최전선 즉 프론테라가 늘어선 요새(要塞) 도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순환식 결혼과 이혼이 보편적 상식으로 통하는 곳이다. 일곱 명의 여성 편력은 피카소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뤄진 이교도와의 전쟁을 통해 정착된 마음의 DNA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라가의 도덕·윤리·관습으로 볼 때 문제될 것이 없다.
피카소를 장밋빛 세계로 인도한 ‘인생의 구원자’
페르난데 올리비에(Fernande Olivier)는 여신찾기 리스트 1호에 해당되는 프랑스 여인이다. 피카소가 23세가 되던 1904년부터 1911년까지, 7년 동안 동거했다. 피카소는 1881년생이다. 1973년 세상을 떠난, 92세 장수만세 기록보유자다.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동갑 나이다. 붉은 머리에다 어릴 때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성이다. 10대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 폭력에 고생하다가 파리로 도망쳐 와 있던 중 피카소를 만났다. 피카소는 19세 때이던 1900년 처음으로 파리에 왔다. 현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 주변은 피카소를 비롯해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21세기 들어서도 마찬가지지만 물랭 루주(Moulin Rouge) 주변의 몽마르트르는 창녀들이 들끓는 파리의 유곽(遊廓)이다. 가난한 피카소를 위한 그림의 모델이자, 프랑스어 선생, 나아가 음식과 청소를 담당하는 여성으로 올리비에를 만난 것이다. 올리비에 역시 특별히 갈 곳도 없던 시기에 피카소와 동거에 들어간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만나, 이른바 ‘장밋빛 시대(Rose Period)’란 화풍에 돌입한다. 붉고 분홍색으로 표현되는, 인생의 환희를 그린 작품들이다. 세계 미술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서커스 단원을 테마로 한 화려한 그림이 올리비에와 만나면서 등장 한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만나기 전, ‘블루 시대(Blue Period)’ 화풍에 빠져 있었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친하게 지냈던 스페인 친구, 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의 자살에 따른 충격으로 블루를 기반으로 한 그림에 매진한다. 피카소에게 블루는 죽음, 고통 그리고 비극이다. 올리비에는 시련에 빠진 피카소를 장밋빛 세계로 인도한 ‘인생의 구원자’에 해당된다. 만약 피카소가 올리비에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 밝은 인생 그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올리비에는 피카소를 입체적 추상화, 즉 큐비즘(Cubism)으로 ‘인도’한 여성이기도 하다. 피레네 산맥 아래로 함께 여행을 가서 창조해낸 작품이 큐비즘의 원천이 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이다. 올리비에는 그림 속 누드 여인의 모델이 된다.
에바 구엘(Eva Gouel)은 식상해가던 올리비에에 이어 나타난, 피카소의 두 번째 여인이다. 피카소보다 네 살 어리다. 원래 다른 화가의 애인이었지만, 피카소가 낚아챈다. 에바는 일곱 명의 여성 가운데 피카소가 그림 모델로 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피카소는 후에 자신이 가장 만족했던 여성이 에바였다고 고백한다. 에바에 대한 피카소의 상념은 사실 고해성사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에바는 피카소와 만난 지 4년 만인 1915년, 서른 살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결핵이다. 애절한 사랑처럼 느껴지지만, 반대로 피카소는 투병 중이던 에바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여성들과 놀아났다.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은 죽기 전에 치러지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피카소가 정확히 언제 에바를 극찬했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오래 살았다고 느끼면서 떠오른 회한(悔恨)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는 피카소의 세 번째 여성이다. 우크라이나 출신 발레리나다. 20세기 초 유럽 전역을 강타한, 이른바 ‘발레 뤼소(Ballets Russes)’ 붐을 타고 파리에서 공연을 하던중 피카소와 만난다. 피카소는 당시 순회공연 중이던 올가 발레단을 화폭에 담기 위해 동행한다. 60명 발레단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올가를 자신의 여성으로 만든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던 1917년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간다. 1년 뒤 아들을 낳으면서 정식으로 결혼한다.
피카소가 가난한 화가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올가 덕분이다. 올가는 명문 군인 집안의 딸이 다.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계 부자들과 사교계에 정통한 여성이다.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에 살던 부자들이 파리로 몰려온다. 올가는 자신의 사교력을 이용해 파티를 벌이면서 상류층 문화를 구축해 나간다. 스페인 출신의 ‘촌놈’인 피카소는 난생처음으로 상류사회의 맛을 알게 된다.
올가는 러시아 부자들에게 남편의 그림을 선보인다. 큐비즘이나 추상화가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입맛에 맞춘 그림들이 ‘대량생산’된다. 고전적 화풍에 의거한, 19세기 스타일의 그림들이다. 스페인 화가의 그림을 처음으로 알아준 고객은 프랑스인이 아닌, 바로 올가의 배경인 러시아 귀족들이다.
‘붉은 피’에서 시작된 얄궂은 운명
올가와의 관계는 결혼 10년째부터 삐걱거린다. 파리 지하철에서 만난 마리 테레즈 월터(Marie-Therese Walter)때문이다. 피카소의 네 번째 여성이다. 피카소는 지하철에서 금발의 마리를 보는 순간 팔목을 잡아당기며 말을 건넸다. “나는 피카소입니다. 당신과 함께 새로운 예술세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당시 마리는 17세, 피카소는 46세다. 미성년자 스토커쯤으로 들리는 얘기지만, 1년 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중, 18세 성인이 된 바로 그날부터 동거에 들어간다. 아예 아파트를 하나 얻어서 두 사람 만의 비밀생활에 들어간다. 마리는 체조와 수영으로 단련된 날씬한 몸매의 여성이다.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남성의 본능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속속 탄생 된다. 마리를 모델로 한 누드화도 수십 점 그린다.
피카소는 부인인 올가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불륜에 들어간다. 프랑스 헌법에 따르면 배우자 모두의 동의 없이는 이혼할 수가 없다. 보통 영화나 책 속에 등장하는 올가의 이미지는 돈에 집착하고, 고급 사치품에 빠지는 야심 찬 여성으로 묘사된다. 피카소를 저주하는 편지를 줄기차게 보냈기에, 악처의 상징처럼 비치는 경우도 있다. 사실과는 다르다. 올가는 피카소와 이혼을 원했다. 이미 다른 여자와 동거에 들어간 상태에서 더 이상 함께 살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피카소가 이혼에 응하지 않았다. 돈 때문이다. 이혼할 경우 재산의 절반이 올가에게 넘어간다. 두 사람은 평생 이혼을 하지 않은, 별거부부로 지낸다. 올가 이후 피카소가 만난 여성들과의 결혼은, 프랑스법에 따르면 전부 위법이다. 스물아홉 살 연하 마리와의 동거는 무려 8년이나 지속된다. 혼외 자식도 하나 낳는다. 마리는 이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인 1977년 세상을 뜬다. 자살이다. 천국에간 피카소를 돌보기 위해 자신도 저세상에 가야만 한다고 말한 뒤 목을 매 자살한다.
마리가 피카소와 헤어지게 된 것은 역시 여성 때문이다.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여성, 도라 말(Dora Maar)이다. 26세 연하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파리의 한 카페다. 차를 마시던 피카소는 맞은편에 앉은 여성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한다. 피(血)다. 식사용 칼을 잘못 잡아 손가락을 베이면서 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피카소는 곧바로 일어나 지혈용 수건을 내밀었다. 비극인지, 운명적 만남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붉은 피’에서부터 시작됐다. 도라는 사진전문 예술가다. 당시 파리는 초현실주의 논쟁으로 들끓고 있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의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전위형 예술이다. 도라는 그 같은 시대의 흐름을 사진으로 옮기는 데 열심이었던, 예술계의 신여성에 해당된다. 피카소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도라를 통해 열심히 습득한다.
마리가 육체라면, 도라는 이성에 무게중심을 둔 관계였다고 분석된다. <우는 여인> 시리즈와 <게르니카(Guernica)>로 표현된 피카소의 초현실주의 화풍은 도라와의 만남을 통해 탄생된 작품들이다. 도라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하다. 실제 도라는 평소에도 자주 눈물을 흘리는 감성형 여성이다. “나에게 그녀는 항상 우는 인물이다. (여성이 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여성이란 동물은 우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우는 모습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현실이다.”
세 명의 여인 동시에 거느린 ‘고통과 번민’
피카소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많은 사진을 남긴 화가다. 이유는 도라 덕분이다. 도라는 피카소의 일거수일투족을 당시 신문명인 사진으로 남긴다. 게르니카 제작 당시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은 또 다른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피카소는 도라의 사진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도라와의 관계는 부인인 올가가 버젓이 살아 있고, 아파트에 거주하는 애인 마리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도라는 자식을 낳질 못했다.
세 명의 여인을 동시에 거느린 ‘고통과 번민’ 상태에서 탈출구로 잡은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의 여섯 번째 여인 프랑수와즈 질로(Francoise Gilot)다. 피카소와 마흔두 살 차이로 21세 때 만난다. 피카소가 63세가 되던 1944년부터 9 년간 동거에 들어간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인텔리다. 독일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던 시기에 피카소와 만나 예술세계에 빠져든다. “친구나 부모·가족 모두와 얘기가 안 통하지만, 피카소를 만나는 순간 서로를 공감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와즈는 자신의 세계관이 뚜렷하고 남성관계도 간단치 않은 인물이다. 유복한 집안의 딸이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에 들어간다. 피카소에 의해 수동적으로 선택된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판단해 피카소와 함께 생활한다.
피카소의 일곱 여성 가운데 유일하게 ‘제 명대로’ 살아가는 여성이다. 아직 생존해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국제 부음란에 크게 실리겠지만,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피카소와의 9년 동안의 생활을 책으로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단하기도 한다. 예술론에 관한 책을 포함해 전부 10여 권의 책을 펴내, 프랑스와 미국 예술아카데미 세계의 전설이기도 하다.
프랑수와즈가 피카소의 ‘재앙(災殃)’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일생을 통해 보여준 능동적 세계관이 큰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수와즈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여성이다. 피카소가 다른 여성과의 불륜에 빠진 것을 안 순간, 미련 없이 떠난다. 스스로 걸어 들어와 동거에 들어갔듯이, 스스로 자유의 몸이 된다. 법학도 출신답게 자신의 두 자식을 피카소의 정식 자식으로 입적시켜 엄청난 위자료 받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후 프랑수와즈는 미국의 백만장자 생리학자와 결혼해 뉴욕으로 날아간다.
난생처음 여성으로부터 절연(絶緣)을 당한 피카소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에 들어간다. 피카소의 일곱 번째 여성인 재클린 로케(Jacqueline Roque)다. 피카소가 재클린을 만난 것은 1954년. 재클린이 27세, 피카소가 73세이던 때다. 당시 재클린은 미망인으로 피카소의 도자기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80세가 되던 1961년 심야 비밀결혼이라는 희한한 방법으로 재클린과 연을 맺는다. 재클린의 계속된 요구로 이뤄진, 피카소 생애 두 번째 정식결혼이다.
총격 부른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
재클린과의 결혼생활은 말년의 피카소를 예술세계로 몰입하게 만든 터전이 된다. 재클린의 ‘전공’을 살려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에 몰입한 시기이기도 하다.
재클린을 모델로 한 그림은 피카소 생애를 통틀어 가장 왕성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무려 400개에 이른다.
고전적 기법에 의거한 그림으로 대부분 재클린에 의해 외부에 판매된다. 재클린의 초상화가 엄청나게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성화에 못 이겨 매일 제출해야만 한 숙제가 재클린 초상화라는 얘기도 있다. 사실, 재클린은 일곱 여성 가운데 돈에 집착한 인물로 유명하다. 재산문제로 각종 소송을 벌인다.
그러나 자타가 인정하듯, 뚜렷한 배경 없는 재클린은 남편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 인물로 기록된다. 피카소가 사망한 지 13년 뒤인 1986년, 재클린은 세상을 뜬다. 권총자살이다. 피카소의 재앙인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 자살자 마리가 세상을 뜬 지 9년 만에 두 번째 자살자 뉴스가 신문지면에 장식된다.
피카소가 이상형으로 그린 여신은 과연 어떤 유형의 인물일까? 일곱 여성의 면면을 보면 피카소의 여성관이 거의 ‘잡식성(?)’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학력·얼굴·몸매·취미·국적·직업·기혼 여부에 관계없다. 주변에서 만나는 여성이라면 닥치는 대로 자기 품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같은 잡식성 취향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나이다. 올리비에 23세, 에바 26세, 올가 26세, 마리 17 세, 도라 29세, 프랑소와즈 21세, 재클린 27세로, 모두 20대 이하의 여성이 피카소의 연인들이다.
피카소가 젊은 여성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 만족을 위해서일까? 피카소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를 얘기지만, 다른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죽음이다.
피카소는 20세 때 인생 최대의 시련에 직면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블루 시대를 연 친구 카사헤마스의 자살이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출품을 위해 함께 프랑스에 갔던 정신적 친구가 카사헤마스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집을 구해 함께 그림을 그린다. 제르메누(Germaine)란 모델을 만난 것은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다. 19세 피카소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프랑스 여인이 바로 제르메누다. 드물게 스페인어가 가능한 여성이었다. 그녀를 통해 프랑스어도 배울 겸, 두 사람은 제르메누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생활이다. 돈도 아끼고 그림공부도 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지만, 예상치 못한 긴장이 일기 시작한다. 카사헤마스가 제르메누를 사랑하지만, 제르메누는 카사헤마스를 눈 밖에 뒀기 때문이다. 상황을 파악한 피카소는 카사헤마스와 함께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피카소가 잠시 마드리드로 떠나 있는 동안 카사헤마스가 다시 파리로 올라간다.
제르메누를 불러내 카페에서 술을 마시던 중 갑자기 총을 꺼내 그녀에게 쏜다. 쓰러진 그녀를 본 뒤 카사헤마스는 곧바로 오른쪽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다. 1901년 2월 추운 겨울이다.
피카소를 ‘잡식성’으로 변신케 한 죄책감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장밋빛 시대로 접어들지만, 이후 피카소 머릿속 어딘가는 죽음의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20세 때의 시련을 통해 죽음의 반대편에 선 삶을 갈구하게 된다. 결론은 여신이다. 죽음과 거리가 먼 젊은 여신이 바로 피카소 일생일대 도피처로 자리 잡는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세월에 찌들수록 집을 지키는 문지기에 불과하다. 젊은 여성, 아니 영원히 죽지 않는 여신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잊게 만드는 처방제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같은 환경과 상황을 피카소의 예술세계로 연결시키게 된다. 젊음이 있기에 예술이 탄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피·돈·권력·명예는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명분이자 근거다. 피카소에게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입체적으로 이뤄진,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예술세계일까? 필자는 그 같은 ‘고상한’ 생각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답을 찾고 싶다. 죽음에 대한 공포,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책감이 잡식성 피카소로 변신시킨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피카소의 유년기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권에 들어가 있다. 아버지 호세 루이즈 브라스코(Jose Ruiz Blasco)는 스스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시골의 미술 선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카소가 처음으로 발음한 스페인어는 ‘피즈(Piz)’다. 연필이란 의미다. 미술 선생이기에 데생에 필요한 연필이 집에 널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아버지의 강훈에 의해 그림공부에 전념한다. 열넷이란 어린 나이의 피카소를 미술대학에 보낸 것도 아버지다. 피카소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16세 때의 작품인, <과학과 자애(慈愛)>의 기본구도와 주제도 아버지가 만들어준 것이다. 아버지 호세에 비해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즈(Maria Picasso Lopez)는 무언으로 자식을 감싸는 여성이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명령하는 동안 피카소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한층 깊어간다. 자신의 예명(藝名)도 어머니 이름에서 따서 피카소로 부른다.
어머니에 대한 피카소의 감정은 평소 자주 인용한 어머니의 유명한 ‘예언’을 통해 추정해낼 수 있다.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수도원에 간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 피카소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 화가로 인생을 시작했고 결국 세상에 유일무이한 ‘피카소’가 됐다고 말한다.
마마보이로까지 불리기에 충분한 피카소의 모습은 여성 여신에 집착하게 된 또 다른 근거라 볼 수 있다. 엄격한 아버지를 피해 프랑스를 전전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늘 가슴에 품었다.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풀어준 것이 바로 수많은 여성이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생 빅토리아(Saint Victoria) 별장에서 사망한다. 20세기 활동한 대부분의 유럽 예술가가 그러하듯, 자신의 조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피카소가 남긴 예술작품의 수는 전 세계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많지 않을까 싶다. 그림·조각·도자기·장식품 등 장르도 총천연색이다.
@ 스페인=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 이곳으로 가 보세요
@ 2014/11/2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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