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文化의 이해·일본사회

일본 기독교의 어제와 오늘

雄河 2015. 12. 23. 16:57
일본 기독교
한 눈으로 보는 일본 기독교사


1. 기독교의 전래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549년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쟈비엘(1506~1552)이 규우슈우

(가고시마)에 들어와서포교함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일본 기독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일본에서 복음사역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1568년 노부나가가 상경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에 따라 황금시대가 도래하였다.
1613년 이에야스(家康)가 금교령을 발표하기 까지 70여년의 기간에

당시 인구 1천5백만 중에서 80만 명의 신자가 신앙생활을 할 정도로 크게 부흥하였다.



2. 기독교 금지령

불교와 유교의 영향 등 여러가지 이유로 기독교는 점차 금지되어갔다.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하고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596년에는 상 필리페호 사건으로 26명의 성인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1613년에는 서양제국 침략의 두려움과 기독교 세력이 강해짐에 따른 지배체제 붕괴의 의식이

커짐에 따라 토쿠가와 막부가 기독교 금지를 결의하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 80만 명의 신자들에게 수많은 비극이 초래되었으며
1622년에는 55명의 크리스천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하는 등
20만 내지 30만의 순교자가 생기게 되었다.

‘금교령’에 의한 혹독한 탄압은 오히려 신자들을 단결하도록 하여
1637년에는‘시마바라의 난’이일어나게 된다.
규우슈우의 시마바라라고 하는곳에서 아마쿠사시로라는 당시 16세의 소년을 우두머리로
농민과 사무라이가 중심이 되어 3만7천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1년 이상 12만 명의 토쿠가와 막부의 군대와 싸워 전원 순교하였다.

1639년 기독교의 부흥을 두려워했던 토쿠가와 막부는드디어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는 쇄국령을 내리고 300년간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다.



3. 기독교 박해


1) 종문개역

1640년 바쿠후는 종문개역을 설치하고 비밀 크리스천들을 단속하였는데

이는 절에 소속한 사람들의 신앙을 조사하여 수록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여행, 혼인, 이사,취직 등을 할 때 이 증명서가 필요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 로서 일본인은 강제로 불교도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2) 테라우께 제도

테라우께제도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에 관계없이 반드시 어딘가의 절에

소속하게하여 그 소속한 절에서 기독교가 아니라는 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3)후미에

후미에란 매년 한 번 마리아나 예수의 그림을 앞에 놓고 밟으면 살려주고 ,

밟지 않으면 크리스천으로판단하여 적발해 내는 제도로서 이 제도로 인하여

수많은 크리스천이 순교를 당했으며 기독교가 해금될 때까지 약 300년간 매년 행하여졌다.


4)오인조 제도

농민들을 다섯 가옥이 한 조가 되게 조직하여 세금이나 범죄 등의 감시와 크리스천 적발을

목적으로 만든것으로 300년간 지속되는 동안 본래 쾌활하고 개방적이고,
단순 소박한 일본인의 성격을 왜곡시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에도 나타나지 않는 대단히 알기 힘든 국민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일본인의 주된 성격으로 남게 되었다.


5)기리시단 유족조사

토쿠가와 막부는 기독교 금지령에 있어서 만약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친족까지 기리시단 계열이라고 하여
남자는 7대까지, 여자는 4대 까지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 특별감시 하에 두었다.

무라하치부라고 해서 장례식과 화재 이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교류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와 같이 상상하기 힘든 박해로 인하여 일본인의 성격이나 체질이 왜곡 형성됨으로서

기독교가 공인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기독교가 부흥하지 못하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4. 열린 문

1854년 일.미 화친조약으로 300년 동안의 긴 쇄국이 끝나고

일본에 또다시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그 무시무시한 탄압 속에서도 300년 전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40년 전인 1865년 규우슈우 나가사키, 오오우라라고 하는 곳에

프랑스 템플이라고 불리우는 카톨릭 회당인 오우라 성당을 지어 졌다.

일본의 감시 속에서 개국 후 처음으로 헌당식이 프랑스영사, 일본거주 외국인,

정박 중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선원 12명 참석하여 거행되었다.
헌당식이 끝나고 2개월이 지난 후 먼발치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던 일본인 남녀 10여명이

갑자기 교회당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리고 검은 가운을 입고 있던 신부에게 갑자기 ‘산타 마리아!’라고 외쳤다.

이것은전혀 예상치 못한 300년 만에 극적으로 크리스천을 발견한 사건이었다.

이들이 우라가미(나가사키에 있는 마을 이름) 기리시단이라 불리 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큰 박해로 거의 전원이 순교를 당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일본에 새로운 복음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 지구촌교회 비젼신문-

http://blog.naver.com/goldnature/20006149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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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회역사연구회장 김수진목사,

일본 기독교의 발자취 발간


일본 기독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적이 출간됐다.
http://chportal.christiantoday.co.kr/news/template/news_view.htm?code=book&id=36280
한일교회역사연구회장 김수진 목사는 최근 ‘일본 기독교의 발자취’(한국장로교출판사)를 펴내고 한국보다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세 1%에 불과한 원인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아울러 야스쿠니 신사 참배,일본의 군국주의화,역사왜곡 등에 대해 일본 교계가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등 역사 바로잡기의 중심에 기독교계가 서있음도 밝혔다.

김 목사는 “일본의 기독교가 엘리트 중심으로 전파됐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파급되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인 대다수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두 신을 섬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마이너리티 그룹이기를 감수해야 하는 요소가 강했다”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특히 “패전 후 일본교회가 미국교회의 힘을 얻어 부흥하는 듯했지만 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며 교회보다는 레저붐이 일게 돼 부흥의 불씨가 계속 타오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김 목사의 일본교회에 대한 미래 진단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보육원 유치원 양로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성장 요인을 배워 실천에 옮기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히노마루(일본국기) 기미가요(국가)가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록 일본 기독교가 과거 일본제국주의 정책의 시녀로 전락하고 뒤늦게 역사적인 회개를 단행하는 등 치욕적인 오류도 갖고 있었지만 무교회주의자였던 우치무라 겐조로부터 아사미,일본 호리네스교회의 이토,소야마,다키에미 목사 및 오노무라(삿포르 기타이치조 교회) 목사,야나이히라(도쿄대) 교수 등 신사 참배에 대항했던 기독인사들이 적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또 기독동신회 수원교회를 세운 노미마츠,탄광촌에서 복음을 전한 오다 목사,고창에 오산학당을 설립한 마쓰도미 장로 등도 조선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일본인 전도자들이라고 김 목사는 평가했다. <국민일보>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2010/06/09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