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천재가수 김정호의 삶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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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조인스 블로그 / 블로거: 리버룸(liberum)
- 2010-03-26 16:49:21
가수 김정호는 본명이 조영호,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부친 조재영씨와
모친 박숙자씨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외조부 박동신은 국악계의 거인이었으나
납북되어 생사를 알수 없었다고 한다.
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진성PD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않았던 이영희. 74년 늦봄 쉘브르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3년간의 열애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만남에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 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83년 재개발로 헐릴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노래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석은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 사이저를 접목하는 새
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0년, 5년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유니버셜,K-APPLE-893,80년3월>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이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 일년이상 치료를 해야했건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아세아,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있는 눈물겨운 음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둘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부인 이영희는 “신보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채 세상을 등졌다.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지식 리더 김민화의 글/사진 구글 이미지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하얀 나비’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2) | |||||||||
그의 재능은 외탁인 듯하다. 서편제의 큰 줄기이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던 월북 소리꾼, 박동실 선생이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다. 월북으로 인해 그의 존재는 판소리사에서 한때 묻혀져 있었지만 박동실은 명창 김소희와 박송희 등을 키워냈던 인물로 김정호의 어머니인 박숙자 여사와 함께 ‘아성극단’을 만들어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공연을 다니기도 했던 ‘명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숙자씨는 아들 정호가 6살 때 집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내다버렸다.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모두 끊어버렸다. 그 힘들고 고된 악극단 생활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기억이 잡힐 듯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생의 전부를 걸어 음악에 몰입했다. 여운이 긴 애상적인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했던 김정호, 노래들이 유독 슬프게 들렸던 것은 그가 노래 속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은 혹 아니었을까. 처음 김정호가 노래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은 대동상고 시절, 밴드부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졸업 후엔 기타를 둘러멘 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을 배회했으며, 심지어는 잠자리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이즈음 잠시 미 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얼마 안돼 또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은 ‘음악’보다 먼저 ‘배고픔’이었다. 당시 한 그릇에 5원하던 노동자 합숙소의 국수, 한 대접에 10원이었다던 남대문 시장의 수제비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한때 가수 백순진씨와 함께 ‘4월과 5월’의 멤버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어니언스가 그의 곡인 ‘작은 새’를 히트시키기에 이르자 음악성을 주목받으면서 작곡자에서 가수로 변신, 무대에 선다.
통기타를 멘 채 눈을 지그시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모습. 그는 76년 3월, 자신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 부인 이영희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하나 이 축복도 잠시였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방 공연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방위 소집에 응하지 못해 결국 탈영병으로 군 영창에 갇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군복무를 마치게 되지만 가정은 이미 어려워져 매번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는 그의 부인은 자신에게 ‘늘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부인은 그가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곳으로 가자면 그렇게 했고, 친구 곁으로 가자면 또 그렇게 했다. 경제적으로 정 버틸 수 없어 어머니 곁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면 또 그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80년, 끈질긴 투병과 부인의 보살핌으로 완전히 나았다던 그의 결핵은 다시 재발되고 급기야 각혈이 시작되자 결국 인천요양소에 격리되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공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다. 비록 그 시기에 대중들 앞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스스로는 늘 음악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그는 많은 곡을 만들었고 악기소리를 연구했으며 음반 또한 취입했다.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 담당의사는 그에게 경고했다. 최소한 6개월에서 3년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고. 심지어 ‘노래를 다시 부르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까지 경고했다. 결핵환자에게 노래는 호흡기관에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되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병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음악에 대한 열병을 또 그렇게 앓고 있었다.
“꽹배기(꽹과리)소리에 미쳐 삽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우리만의 것, 우리만의 맛, 우리만의 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무엇인지 이제서야 비로소 찾은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그 무렵 뜻 맞는 친구들과 사물놀이 패를 조직하기도 했고 또 항시 꽹과리를 들고 다녔다. 병이 악화돼 병원에 다시 실려 갈 때도 꽹과리를 병실에 까지 가지고 들어가 담당의사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치겠다.’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의지를 내보이던 김정호, 그가 새삼 그립다.
서울신문 sachilo@empal.com @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iberum&folder=47&list_id=1145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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