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부활과 한국사회
21세기 벽두, 동아시아 문명권의 화두는 공자의 부활이다. 1919년 5·4운동과 1960년대 문화혁명 시절, 타도의 대상이었던 공자점(孔子店)을 불과 30여 년 만에 21세기 동아시아 문명의 아이콘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중국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지난 한국인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공자와 유교의 양상들을 살펴봄으로써 해답의 계기를 모색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유교의 연원에 대해서 서로 대립하는 견해들이 있다. 하나는 공자 이전에 유교를 형성한 배경으로서의 상고대 사상, 소위 하·은·주 삼대를 계승한 원시 사상이 이미 우리 민족에게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곧 유교사상의 원시적 형태가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東夷族)으로부터 발원한다는 류승국의 주장과 기자 동래설에 근거해서 “(중국이 아닌) 조선이 유교의 조종(祖宗)”이라고 주장하는 장지연의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병도는 기자 동래설을 부정하고 중국 진한(秦漢) 시기의 유교가 한사군(漢四郡)을 통해 전래되었다고 했고, 이기백은 한국 유교의 기원을 주체적 수용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며 삼국시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한 것이 그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보면, 삼국시대의 유교는 발전된 문명 체계, 곧 고대 국가의 정치제도와 지배계층의 윤리의식 또는 의리(義理)와 도의(道義)라는 자기 수양, 또는 공동체의 리더십으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유교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종교인 불교와 선도(仙道)와 공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세속오계를 통해서 보면, 유교와 불교 및 선도 등 당시의 사상들이 종파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공존하였던 것이다.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들어가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뜻”이라고 서술하였듯이, 당시의 공자는 충효(忠孝)라는 윤리의식의 상징적 존재였다. 한국의 고대 유교는 고려시대 무신의 난을 기점으로 붕괴된다. 이념화, 형이상학화된 주자학이 고려 말에 수용되고, 조선조에 예학(禮學)의 일반화가 시도된 것은 바로 고려말 유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유교가 단순히 윤리적·정치적 기능을 벗어나 종교적·교파적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형성된 정주학(程朱學), 곧 도학(道學)의 수용과 관련되어 있다. 도학이란 주자에 이르러 완성된 일종의 이념운동으로서 이전의 유교와는 판연히 다른 도통(道統) 의식과 유교에서 궁극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배타성을 특징으로 한다.
도학의 종파의식은 단지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주자는 금(金)나라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이어 원(元)제국이 남송마저 병탄한 불안한 시기에 생존하였다. 그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인재들을 양성할 이념과 사상을 새로운 유교 곧 성리학에서 찾았다. 주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집단은 강한 사회적 책임의식과 도덕의식으로 무장하여, 주자 당시에도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일종의 결사(結社)였다.
최일범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교수
@ 2010/03/22 1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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