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政治·한국경제
초등학교 덧셈수준의 한국외교 vs.일본외교는 고차방정식 수준
雄河
2015. 12. 27. 21:10
초등학교 덧셈수준의 한국외교 vs.일본외교는 고차방정식 수준
한국외교 반세기 산증인 공로명 前 외무부 장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미국이 우리편 들어줄지 고민해봐야" 아베 연설은 고등수학…한국 대응은 초등학교 덧셈수준에 머물러 | ||
기사입력 2015.04.24 16:05:42 | 최종수정 2015.04.24 21:5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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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外交 | 日本外交 |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을 찾아간 것은 지난 20일.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가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그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중국이 과거사 문제에서 우리와 공동 전선을 펴는 것처럼 보이지만..."
60년 가까이 한국 외교 현장이나 그 지근거리에 있었던 그는 역사 문제로 우리가 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이틀 후 아베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 없는 반성문을 내놨다. 시진핑은 아베를 만나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아는 그의 눈으로 볼 때 오는 29일 아베가 일본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할 때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의 사죄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는 8월 15일 2차 대전 종전 70주년에 즈음해 총리 담화를 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단순하고 경직적으로 대응하면 아베의 책략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외교의 원로는 몇 수 앞까지 내다봤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국제 사회에서 되레 우리의 협량(도량이 좁음)을 비난할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는 냉철하게 현실을 짚어나갔다.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까 염려한다.
▷한국 대통령은 일본과는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가운데 중국 정상과 너댓 차례 만났다. 한국 대통령은 중국 말도 한다. 두 정상의 친분도 두터운 것으로 비쳐진다. 워싱턴과 도쿄에서는 벌써부터 한국이 중국에 기울어졌다고 속삭이고 있다. 이는 대미 외교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은 꼭 생산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유럽 정상들은 비행기 타고 두세 시간 만에 회담을 하고 온다. 우리가 너무 명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베 정부가 진정한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한다.
▷한·일 간에는 과거사와 독도 문제가 있지만 당장은 위안부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양국 국장급 협의가 계속되고 있다.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어느 정부든 민족주의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다.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조용하게 관리해가는 것이 옳다.
―오는 29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아베의 역사 인식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나.
▷지난해 7월 호주 의회에서 아베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일본은 침략전쟁 후 새로 출발했으며 호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준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일본의 자존심을 지켰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의 연설은 고등수학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 대응은 초등학교 덧셈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진정한 사죄가 없으면 한·일 관계는 다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운신을 더욱 제약할 것이다. 아베는 한편으로 시진핑도 만나고 있다.(공 전 장관은 중국이 어느 나라보다 실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자칫 한·일 관계만 과거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일본에 대해 역사를 직시하라고 주문했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며 값싼 박수를 받으려 한다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 말을 괘씸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그 저류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일 두 나라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가는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다"고 밝혔으며 김 대통령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평가한다고 답했다.)
―지난달 23일 한·일 원로들이 아베를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나.
▷해방 70주년과 수교 50주년인 올해 정상회담을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상회담을 위한 환경 정비가 필요하며 정치 지도자들의 백업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미·일의 밀월관계가 한·미 사이에 금이 가게 할 수 있다.
▷워싱턴의 한국 전문가는 곧 일본 전문가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한국이 같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일본이 자꾸 한국은 중국에 경사된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사드 문제는 결론은 너무나 뻔한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드 문제에 대해 중국 말만 듣다가는 우리 안보가 발가벗겨진다.
―워싱턴에 한국 배제론(Korea passing)이나 한국 피로증(Korea fatigue)이 있다면.
60년 가까이 한국 외교 현장이나 그 지근거리에 있었던 그는 역사 문제로 우리가 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이틀 후 아베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 없는 반성문을 내놨다. 시진핑은 아베를 만나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아는 그의 눈으로 볼 때 오는 29일 아베가 일본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할 때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의 사죄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는 8월 15일 2차 대전 종전 70주년에 즈음해 총리 담화를 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단순하고 경직적으로 대응하면 아베의 책략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외교의 원로는 몇 수 앞까지 내다봤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국제 사회에서 되레 우리의 협량(도량이 좁음)을 비난할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는 냉철하게 현실을 짚어나갔다.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까 염려한다.
▷한국 대통령은 일본과는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가운데 중국 정상과 너댓 차례 만났다. 한국 대통령은 중국 말도 한다. 두 정상의 친분도 두터운 것으로 비쳐진다. 워싱턴과 도쿄에서는 벌써부터 한국이 중국에 기울어졌다고 속삭이고 있다. 이는 대미 외교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은 꼭 생산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유럽 정상들은 비행기 타고 두세 시간 만에 회담을 하고 온다. 우리가 너무 명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베 정부가 진정한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한다.
▷한·일 간에는 과거사와 독도 문제가 있지만 당장은 위안부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양국 국장급 협의가 계속되고 있다.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어느 정부든 민족주의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다.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조용하게 관리해가는 것이 옳다.
―오는 29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아베의 역사 인식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나.
▷지난해 7월 호주 의회에서 아베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일본은 침략전쟁 후 새로 출발했으며 호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준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일본의 자존심을 지켰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의 연설은 고등수학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 대응은 초등학교 덧셈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진정한 사죄가 없으면 한·일 관계는 다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운신을 더욱 제약할 것이다. 아베는 한편으로 시진핑도 만나고 있다.(공 전 장관은 중국이 어느 나라보다 실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자칫 한·일 관계만 과거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일본에 대해 역사를 직시하라고 주문했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며 값싼 박수를 받으려 한다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 말을 괘씸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그 저류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일 두 나라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가는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다"고 밝혔으며 김 대통령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평가한다고 답했다.)
―지난달 23일 한·일 원로들이 아베를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나.
▷해방 70주년과 수교 50주년인 올해 정상회담을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상회담을 위한 환경 정비가 필요하며 정치 지도자들의 백업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미·일의 밀월관계가 한·미 사이에 금이 가게 할 수 있다.
▷워싱턴의 한국 전문가는 곧 일본 전문가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한국이 같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일본이 자꾸 한국은 중국에 경사된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사드 문제는 결론은 너무나 뻔한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드 문제에 대해 중국 말만 듣다가는 우리 안보가 발가벗겨진다.
―워싱턴에 한국 배제론(Korea passing)이나 한국 피로증(Korea fatigue)이 있다면.
▷서글픈 이야기지만 'When the chips are down(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미국이 어떻게 나오겠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까지는 펜타곤(국방부)이 우리를 도와줬다. 1997년 환란 때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일본에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도 국제통화기금(IMF)에 가보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고 나선 게 펜타곤이고 국무부다. 또 다시 발벗고 나서야 할 상황이 올 때 그들이 과연 어떻게 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미국은 미·일 동맹을 더 챙기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역사적으로 미국이 우리를 두 번 배신했다고 지적했다. 1882년 조미수호조규에서 열강이 조선을 부당하게 억압할 때 돕겠다고 해놓고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할 때 외면했다. 또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맞바꾼)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1910년 병탄조약 때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조약(대일 강화조약) 때도 막판에 일본 측 요구를 듣고 애매하게 처리한 부분이 있다. 한·일이 다툴 때 미국이 최종적으로 누구 편을 드느냐. 지금까지는 일본 편을 들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이제 미국의 세기는 저물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와는 위상이 달라졌지만 저물어간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대항세력으로 중국을 자꾸 이야기하지만 중국은 글로벌 파워로서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다. 특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반세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미국만큼 젊은 나라가 없다. 중국은 고령화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있다. 국제적으로 독불장군은 없다. 미국의 우방은 많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우리 무역의 4분의 1이 중국에 의존한다는 데 이는 상호관계다. 중국에 올인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우리가 중국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G2 사이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중국에 많은 물건을 팔고 있지만 그 기술은 어디에서 오는가. 미국과 일본에서 온다. 물론 중국의 잠재력은 인정한다. 무서운 힘을 가진 민족이다. 화약을 발명했고 위성항법장치가 나오기 전 지구촌의 길잡이가 됐던 나침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딴 나라와 달리 중국과는 지난 세기까지 우리와 맺었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대관계이고 종속관계였다. 이제는 자주와 자존을 강조해야 할 때다.
―김정은 체제 북한은 개혁과 개방으로 갈 수 있나.
▷북한에 관한 한 결코 낙관론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눈에서 불이 난다. 늘 바라는 것은 그들이 자기보존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다. 막상 불을 뿜는 전쟁을 하면 북한도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북한 군사력에 대해서도 조금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닥치면 참으로 생각하기 싫은 결과를 불러온다. 북한이 속된 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국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용인할 것인가.
▷얼마 전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누구보다 중국을 잘 안다. 그는 중국이 북한 카드를 버리지 않을 것으로 봤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원리다. 중국은 내심 자기들에게 절대 총부리를 겨누지 않을 북한의 존재를 바람직하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나라 군대가 국경선까지 올라와 있을 때와 완충지대가 있을 때 어느 쪽이 편하겠는가.
―한국 외교는 여론에 쉽게 흔들린다.
▷여론은 뜬구름 같아서 한 곳에 단단히 닻을 내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십은 예지력에서 나온다.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갖고 여론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한국 외교는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외교 전선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겪은 때는.
▷역시 한·일 간 충돌이 생겼을 때다. 좀 더 냉정하고 유연한 입장을 취했으면 좋았을 때 우리도 강경하게 맞붙을 경우다. 김영삼 대통령 때 대일 관계가 좋지 않았다. 환란이 터지자 종전 같으면 일본 내 로비력을 동원했을 텐데... 그때는 일본 재계를 설득할 힘이 없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오래 같이 일했다.
▷같이 일할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남북핵통제위원장으로 있을 때 그가 부위원장이었다. 갑자기 그의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는 나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일이 끝나면 시골에 내려가 빈소를 지키다 새벽에 올라와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선공후사가 철저한 사람이다.
―외교관이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은.
▷선배들이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록 사무관으로서 면서기와 같은 서류작업을 하더라도 생각은 늘 대통령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나라를 대표해 국익을 지키겠다는 정신이 필요하다. 부단히 공부하고 자기계발해야 하는 직업이다.
―숱한 나라를 누볐을텐데 한국은 전성기가 지났다고 느끼나.
▷우리 국민은 개성이 뚜렷하고 강하다. 그 에너지를 잘 모아 나라의 힘으로 만들면 21세기에도 뻗어나갈 수 있다. 아직 노쇠단계가 아니라 청장년기다. 대중 시위도 일종의 에너지다. 일본에는 그런 게 없다. 중국에서도 천안문 사태 이후 그런 게 없다.
■ 공로명 前 외무부 장관은…
1932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거쳐 195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전쟁 통에 10년 만에 졸업했다.
통역장교로 복무하다 1958년 촉탁으로 외무부에 들어간 후 러시아, 일본 대사를 거쳐 25대 외무장관(1994~96년)을 지냈다. 지금은 동아시아재단 이사장과 동서대 석좌교수. 지난해 한국 외교 50년사를 정리한 '나의 외교노트'를 출간했다. 한·일 관계에 관해서는 '모든 것은 변해도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생존전략은 확고한 안전보장체제, 냉철한 사고, 균형감각, 미래지향적 관점에 있다고 믿고 있다.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393156
―미국은 미·일 동맹을 더 챙기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역사적으로 미국이 우리를 두 번 배신했다고 지적했다. 1882년 조미수호조규에서 열강이 조선을 부당하게 억압할 때 돕겠다고 해놓고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할 때 외면했다. 또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맞바꾼)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1910년 병탄조약 때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조약(대일 강화조약) 때도 막판에 일본 측 요구를 듣고 애매하게 처리한 부분이 있다. 한·일이 다툴 때 미국이 최종적으로 누구 편을 드느냐. 지금까지는 일본 편을 들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이제 미국의 세기는 저물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와는 위상이 달라졌지만 저물어간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대항세력으로 중국을 자꾸 이야기하지만 중국은 글로벌 파워로서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다. 특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반세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미국만큼 젊은 나라가 없다. 중국은 고령화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있다. 국제적으로 독불장군은 없다. 미국의 우방은 많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우리 무역의 4분의 1이 중국에 의존한다는 데 이는 상호관계다. 중국에 올인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우리가 중국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G2 사이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중국에 많은 물건을 팔고 있지만 그 기술은 어디에서 오는가. 미국과 일본에서 온다. 물론 중국의 잠재력은 인정한다. 무서운 힘을 가진 민족이다. 화약을 발명했고 위성항법장치가 나오기 전 지구촌의 길잡이가 됐던 나침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딴 나라와 달리 중국과는 지난 세기까지 우리와 맺었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대관계이고 종속관계였다. 이제는 자주와 자존을 강조해야 할 때다.
―김정은 체제 북한은 개혁과 개방으로 갈 수 있나.
▷북한에 관한 한 결코 낙관론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눈에서 불이 난다. 늘 바라는 것은 그들이 자기보존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다. 막상 불을 뿜는 전쟁을 하면 북한도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북한 군사력에 대해서도 조금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닥치면 참으로 생각하기 싫은 결과를 불러온다. 북한이 속된 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국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용인할 것인가.
▷얼마 전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누구보다 중국을 잘 안다. 그는 중국이 북한 카드를 버리지 않을 것으로 봤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원리다. 중국은 내심 자기들에게 절대 총부리를 겨누지 않을 북한의 존재를 바람직하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나라 군대가 국경선까지 올라와 있을 때와 완충지대가 있을 때 어느 쪽이 편하겠는가.
―한국 외교는 여론에 쉽게 흔들린다.
▷여론은 뜬구름 같아서 한 곳에 단단히 닻을 내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십은 예지력에서 나온다.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갖고 여론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한국 외교는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외교 전선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겪은 때는.
▷역시 한·일 간 충돌이 생겼을 때다. 좀 더 냉정하고 유연한 입장을 취했으면 좋았을 때 우리도 강경하게 맞붙을 경우다. 김영삼 대통령 때 대일 관계가 좋지 않았다. 환란이 터지자 종전 같으면 일본 내 로비력을 동원했을 텐데... 그때는 일본 재계를 설득할 힘이 없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오래 같이 일했다.
▷같이 일할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남북핵통제위원장으로 있을 때 그가 부위원장이었다. 갑자기 그의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는 나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일이 끝나면 시골에 내려가 빈소를 지키다 새벽에 올라와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선공후사가 철저한 사람이다.
―외교관이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은.
▷선배들이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록 사무관으로서 면서기와 같은 서류작업을 하더라도 생각은 늘 대통령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나라를 대표해 국익을 지키겠다는 정신이 필요하다. 부단히 공부하고 자기계발해야 하는 직업이다.
―숱한 나라를 누볐을텐데 한국은 전성기가 지났다고 느끼나.
▷우리 국민은 개성이 뚜렷하고 강하다. 그 에너지를 잘 모아 나라의 힘으로 만들면 21세기에도 뻗어나갈 수 있다. 아직 노쇠단계가 아니라 청장년기다. 대중 시위도 일종의 에너지다. 일본에는 그런 게 없다. 중국에서도 천안문 사태 이후 그런 게 없다.
■ 공로명 前 외무부 장관은…
1932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거쳐 195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전쟁 통에 10년 만에 졸업했다.
통역장교로 복무하다 1958년 촉탁으로 외무부에 들어간 후 러시아, 일본 대사를 거쳐 25대 외무장관(1994~96년)을 지냈다. 지금은 동아시아재단 이사장과 동서대 석좌교수. 지난해 한국 외교 50년사를 정리한 '나의 외교노트'를 출간했다. 한·일 관계에 관해서는 '모든 것은 변해도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생존전략은 확고한 안전보장체제, 냉철한 사고, 균형감각, 미래지향적 관점에 있다고 믿고 있다.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39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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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5 18:38